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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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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홍보담당: 세이브더칠드런 미디어팀
전화 : 02-6900-4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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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더칠드런, 르완다 학살 당시 미아가 된 아이들의 모습 공개
- 르완다 학살 20주년 맞아 당시 촬영한 난민•고아 아동 사진과 서류 일반에 공개
- 세이브더칠드런의 도움으로 친지와 상봉한 아이들 20년 후 다시 찾아
1994년 4월 일어난 르완다 학살 20주년을 맞아 당시 가족을 잃고 고아가 되었던 아이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사진들이 공개됐다.
국제구호개발 NGO 세이브더칠드런(www.sc.or.kr)은 6일, 르완다 학살 20년을 맞아 당시 아동보호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가족을 잃고 난민촌이나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들의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촬영한 폴라로이드 사진 및 관련 서류들을 공개했다.
1994년 4월 7일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발발한 르완다 내전은 100일만에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될 정도(유엔)로 20세기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되고 있다. 희생자 중 30만 명이 어린이로 추정되며, 당시 르완다와 인근 국가에서 가족과 헤어진 아이가 8만~10만 명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이브더칠드런, 국제적십자위원회, 유니세프 등 국제 단체들은 미아의 신원을 확인하고 가족이나 친지를 찾아주는 가족 추적 및 재결합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당시 약 8,000명의 미아를 만나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서류에 인상 착의와 특징 등을 기록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과 관련 서류들은 세이브더칠드런이 그 당시 부모와 가족을 잃고 난민촌,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촬영하고 아이들의 출신 지역, 특징 등을 기록한 것이다. 이 사진과 기록은 아동이 거주하던 마을이나 인근 지역 출신 사람들에게 전해져 아동의 신원을 파악하고 생존한 가족을 찾아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올해 3월, 세이브더칠드런은 당시 이 프로그램을 통해 가족을 찾은 아동이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이제는 어른이 된 몇몇 아동들을 20년 만에 다시 만나 당시의 경험과 그 경험이 어린 시절에 미친 영향,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세이브더칠드런의 도움으로 친척을 찾을 수 있었던 플로두아드 씨(당시 15세)는 20년 만에 당시 자신과 두 동생 사이프리언(당시 13세), 글로리오스(당시 5세)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서류를 보고 학살 때 겪었던 모든 일들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목숨을 잃은 날짜인 1994년 4월 11일을 여전히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는 시체 밑에 몸을 숨겨 간신히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도망치다 르완다 애국전선(RPF)에 의해 고아 보호 시설에 보내진 플로두아드 씨 남매는 세이브더칠드런이 촬영한 사진과 작성했던 서류를 통해 수소문 끝에 삼촌과 연락이 닿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현재 농부이자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가고 있는 플로두아드 씨는 내가 겪은 일은 너무나 끔찍했다며 나의 아이들은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절대 그렇게 끔찍한 일을 겪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할머니 집에 갔다 대학살이 벌어져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피난한 에반스 씨(당시 8세)도 비윰바의 고아원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의 도움을 받아 삼촌을 만날 수 있었다. 에반스 씨는 당시 찍은 사진을 보고 이 사진이 찍힌 후에야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며 그 때의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어린 시절 사진이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은데 세이브더칠드런이 이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나를 보기 위해 왔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세이브더칠드런 르완다 사업장 프로그램 매니저인 한나 매튜스는 당시 세이브더칠드런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사진과 함께 그들의 행동까지 유심히 관찰해 기록으로 남겼고, 다시 찾은 부모님이나 어른들의 사진도 함께 찍었기 때문에 가족을 되찾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대한 양의 서류가 남았다며 아마도 상당수 사람들에게 이 사진이 어린 시절 모습이 담긴 유일한 사진일 것 이라고 말했다.
그 동안 난민이 대규모로 발생하는 세계 곳곳의 분쟁, 자연재해 지역에서 아동을 보호하고 가족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진행해 온 세이브더칠드런은 현재 르완다에서 정부, 타 기관 및 이해관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역 아동보호 사무소를 통해 10만 명 이상의 아동들을 지원하고 있다.
[사례]
1. 플로두아드(35세), 사이프리언(33세), 글로리오스(25세) 남매
르완다 학살이 일어났을 때 잘리 지역에 살던 첫째 플로두아드 씨는 15살이었다. 부모님의 목숨을 앗아간 끔찍한 학살 속에서 시체 밑에 몸을 숨겨 간신히 목숨을 구한 그는 13살 남동생 사이프리언과 5살 여동생 글로리오스, 그리고 2살배기 막내 여동생을 데리고 피난길에 나섰다.
후투족 무장세력 인테라함웨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다행히 르완다 애국전선이 들어오면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 남매는 이들의 보호를 받다 비윰바의 고아 보호 시설에 보내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했던 2살배기 막내 여동생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삼남매의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겨 이를 토대로 생존한 삼촌을 찾아주었고 이들은 다시 잘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첫째 플로두아드는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전선에 뛰어들어 돈을 모아 부모님이 가지고 있던 땅에 동생들과 함께 살 집을 지어 삼촌에게서 독립했다. 이후 결혼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플로두아드는 현재 농사를 짓고 있다. 남동생 사이프리언은 중학교까지 무사히 마치고 르완다 군에 들어가 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다. 여동생 글로리오스는 현재 대학에서 작물학과 수의학을 공부하고 있다. 글로리오스의 꿈은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해 동생들을 돌보느라 고생한 큰 오빠 플로두아드의 아이들에게 학비를 대주는 것이다.
“부모님이 목숨을 잃은 건 1994년 4월 11일이었습니다. 바로 여기 니야미탕가[플로두아드가 현재 살고 있는 잘리의 작은 마을]에서요.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시체들 밑에 숨었어요. 내 몸은 다행히 숨길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다 보고 말았습니다…. 동생들과 계속 같이 있었어요. 동생이 세 명이었는데 막내는 겨우 두 살이었어요. 하지만 나는 아기를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잘 몰랐고 막내는 결국 비윰바에 도착하고서 숨을 거두었어요. …지금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자녀들은 저처럼 전쟁의 참혹함을 겪지 않았으니 저보다 더 좋은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런 끔찍한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플로두아드
“그 일이 일어났을 때 나는 너무 어렸고[5세], 그 이후로 아무도 당시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나에게 이야기해 주지 않았어요. 이 사진을 찍었을 때 아마도 나는 모든 일이 잘될 거라고 계속 믿고 있었던 것 같아요. 엄마, 아빠도 어딘가에 살아 계셔서 곧 우리를 데리러 오고 그 다음에 다시 모두가 아무 걱정 없이 살게 될 거라고 말이에요. ... 대학 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구해서 큰오빠 아이들의 학비를 대주고 싶어요. 오빠는 우리를 위해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했으니까요.”
- 글로리오스
2. 장 밥티스트(34세)와 에반스(28세) 형제
학살 당시, 장 밥티스트는 14세, 에반스는 8세였다. 부모님은 목숨을 잃었고, 이들은 발견되면 죽는다는 생각 이외에는 아무 생각도할 수 없는 채로, 그저 뛰고, 숨고, 뛰고, 숨고 해가며 며칠을 보냈다. 비윰바로 간신히 피난해 고아 보호 시설에 간 형제는 세이브더칠드런의 도움으로 삼촌을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여럿 돌보고 있던 삼촌은 형제를 학교에 보낼 여력이 되지 못했다. 장 밥티스트는 누나 집으로 옮겨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중학교에 입학은 했으나 학업을 지속할 수 있도록 지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여서 학교를 마치지 못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잡일을 하며 지내다, 큰 경비회사에서 직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고 현재까지 7년째 경호원으로 일하고 있다. 동생 에반스는 키갈리 지역의 정육점에서 일하고 있다.
“사진을 보았을 때,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사진 속에 아직도 어린 아이로 남아있는 제 사진을 보고도 믿기지가 않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사진이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거든요. 당시 사진을 보니, 고통 속에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사진 속의 아이[에반스 자신을 가리킴]는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진을 찍은 뒤에야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더욱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대학살의 끔찍한 일을 경험한 것이 바로 어제 같습니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제가 겪은 이런 고통을 아이들이 겪지 않았으면 합니다.”
– 에반스
고아 보호 시설에서 지내는 것은 완전히 홀로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가족, 문화, 아무 것도 없이 존재 자체가 뿌리 채 뽑히는 것 같았지요. 그때의 삶은 모든 것이 멈춰서 이 세상에 혼자 남아있는 것과 같았어요. 하지만 삼촌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나는 우리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것, 살아남은 친척이 있고 삶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렸을 때 가족을 잃었습니다. 그 이후로 너무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 나도 부모가 되었고 자식들을 키우고 있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더 느끼게 됩니다. 가족은 한 아이가 보호받을 수 있는 주요 원천입니다. 나는 이제 나의 자식들이 홀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아이들을 충분히 먹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린 시절 고생했던 것을 자식들은 경험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나의 아이들은 절대로 폭력이나 착취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요.
- 장 밥티스트
[사진]
1. 20년 전 아이들의 폴라로이드 사진
사진/1994년 4월 7일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발발한 르완다 내전은 100일만에
80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20세기 최악의 집단 학살로 기록되고 있다.
국제구호개발 NGO 세이브더칠드런은 르완다 학살 20주년을 맞아 당시 가족을 잃고 난민이나
고아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공개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집단 학살
당시 부모와 가족을 잃고 난민촌,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촬영한
사진으로 아동의 신원을 파악하고 생존한 가족을 찾아주는데 큰 역할을 했다.
2. 플로두아드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현재 모습
사진/플로두아드(35) 씨가 르완다 학살 발생 1년 후인 1995년 세이브더칠드런이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
작성한 자신과 두 동생의 서류를 보고 있다. 르완다 학살 발생 당시 15살이었던 그는 현재 농부이자
세 아이의 아빠이다.
3. 에반스의 폴라로이드 사진과 현재 모습
사진/에반스(28세) 씨는 학살 당시 부모님을 잃고 형과 함께 비윰바의 고아 보호 시설에 있던 중
세이브더칠드런의 도움으로 삼촌을 만날 수 있었다. 현재는 키갈리 지역의 정육점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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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브더칠드런은 전 세계 120여 개 국가에서 아동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인종, 종교,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여 활동하는 국제 구호개발 NGO입니다. (www.sc.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