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세계적인 사진작가 리카르도 벤투리가 만난
아이티 아이들
2010년 1월 12일.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에 강도 7.0의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 지진으로 23만 명이 숨지고160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무너지거나 훼손된 학교도 약 5000곳이었습니다.
그리고 5년이 흐른 지금, 아이티의 아이들은 이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세이브더칠드런은 당시 아이티의 모습을기록한 ‘아이티 지진 그 이후(Haiti Aftermath)’로 2011년 세계보도사진전에서 일반 보도 부문 단사진 1위를 수상한 사진작가 리카르도 벤투리(Riccardo Venturi)와 함께 그곳 아이들을 만나고 왔습니다.
장탈: 제가 붙잡았던 아기가 죽었어요
“지진이 나던 순간 저는 음식을 만들고 있었어요. 집이 흔들린다는 것을 느꼈죠. 근처에 아기가 있어 붙잡았는데 저와 아기 위로 벽이 무너졌어요. 아기는 머리를 다쳤고 그 다음날 죽었어요. 제 다리는 부러졌고 매년 그날이면 다리와 머리가 아파요. 다리가 세 동강 났었어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온 의사들이 다리를 고쳐주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는 다리를 잃었을 거예요.”
“(지진이 났던) 1월 12일이 다가오면 다리와 머리가 아파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니 무서워요. 매년 그날에는 가족과 교회에 가고 사흘 동안 기도를 해요.”
베치나: 제 무릎의 상처가 보일 때면 그때 일이 화제에 오르죠
“지진이 일어났을 당시 저는 마르티상에 살고 있었어요. 동생을 씻기고 있었는데 땅이 흔들리자 우리는 도망쳤어요. 도망치다가 저는 넘어져 다쳤어요. 그때 제게 한 여성이 다가와 저를 잔해에서 꺼내주고 엄마가 오실 때까지 도와주셨어요.”
“시멘트 덩어리가 무릎으로 떨어졌고 우리 집도 완전히 무너졌어요. 지진 때 많은 사람이 죽어서 지금은 그때보다 사람이 많이 줄었어요. 무릎을 다쳐서 한 동안 병원에 입원했어요. 무릎을 꿰맸고 병원을 왔다 갔다 했죠. 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걸어 다녔는데 그때는 걸을 수 없었어요.”
“사람들이 그때 일을 많이 이야기해요. 제 무릎의 상처가 보일 때면 그때 일이 다시 화제에 오르죠.”
마리 달린: 살아 남아야 해요
“이곳 난민캠프에서 산 지 4년이 되었어요. 이곳에 사는 게 싫지만 그나마 가진 곳이 이곳이니까요. 우리는 살아 남아야 해요. 저희 엄마는 옷 가게를 운영하셨지만 사람들이 외상을 지고 돈을 주지 않아 문을 닫았어요. 지금은 돈을 벌지 못하고 계시죠.”
“이곳은 전혀 안전하지 않은 것 같아요.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거든요. 경찰관이 살해당한 적도 있었어요. 경찰서는 있지만 경찰관이 없어요. 밤이면 다닐 수 없고, 길에 젊은 남자들이 있으면 우리를 붙잡을까 봐 무서워요.”
“또 지진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요. 지난 지진 때는 제가 거의 죽을 뻔했어요. 그날 땅이 흔들린다는 것을 느끼고 일어났는데 일어나자 마자 제가 앉아 있던 의자에 돌덩이가 떨어졌어요. 신이 저를 살린 것이라 생각해요.”
“가수 셀린 디온이 좋아요. ‘I believe’이란 노래를 좋아하는 데 정말 목소리가 아름답거든요.”
티파니(가명):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저는 아침 6시에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바닥을 쓸고 물을 길러와요. 요리를 하고 빨래도 하죠. 이모와 사촌 5명의빨래를 제가 해요.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은 저뿐이에요. 보통 8-9시에 잠드는 데 바닥에서 자요. 여자들이 쓰는 방에서 다른 4명과 자지만 바닥에서 자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제 잠자리도 제가 정돈하고 이모와 사촌들 잠자리도 제가 정돈해요. 이불보를 빨고 셔츠와 바지, 티셔츠, 블라우스를 다리는 것도 제 몫이죠.”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어요. 학비와 음식, 음료수를 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겪는 고통을 제가 알기 때문이죠.”
“아이들의 밝은 모습 뒤에 감추어진 비애를 담으려 했습니다” -아이티를 담는 세계보도사진전 수상 작가 리카르도 벤투리 Q 아이티에 다시 오니 어떤가요? A 지난 2년 동안 오지 못했던 곳인데 이렇게 다시 찾으니 강렬한 느낌이 듭니다. 지난 번에 왔을 때는 지진으로 인한 상처가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집을 잃은 사람들도 잔해도 여기 저기 있어서 마치 포르토프랭스가 이렇게 영원히 남을 것만 같았습니다. 오늘 다시 와보니 여전히 혼란스럽고 정신 없기는 하지만 질서를 조금씩 잡아가는 모습입니다. 기적처럼 생존의 길을 찾아 꿈틀대는 여느 대도시의 혼잡함 속에 그날의 기억이 파묻힌 것 같습니다. Q 아이티에 다시 오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A 저는 아이티 지진이 이곳 사람들에게 남긴 결과를 추적하는 장기 프로젝트 ‘아이티 지진 그 이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5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곳 상황을 직접 보는 것이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아이티 지진 그 이후’는 결국, 세계 언론이 새로운 속보를 찾아 모두 떠나간 이후에도 인도적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는 증언이며 성찰입니다. Q 지진 직후 받은 인상이 어땠고, 이번에 받은 인상은 어땠나요? A 지진이 발생하고 며칠 후 이곳에 왔을 때는 사그라들지 않던 혼란, 절박한 얼굴로 도시를 떠돌던 사람들이 가장 마음 새겨졌습니다. 오늘 제가 본 포르토프랭스는 여전히 차와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지만 그때와 달리 더 이상 공포나 고통의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Q 5년 전 아이티 아이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포착했다면, 오늘은 무엇을 보았고 어떤 모습을 담았나요? A 당시에는 누구보다 아이들에게서 두려움과 충격에 찬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는 웃음을 되찾고 하루 하루를 온전하게 사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아이티 아이들은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한 가득 안고 살죠. 하지만 그 표면 아래에는 그때의 지진으로, 또는 일상의 시련으로 겪는 고통과 상처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존엄함을 지켜는 선에서 그들이 감추어 두었던 비애를 사진 속에 담으려 했습니다. |
세이브더칠드런은 티파니와 같이 다른 가족에 얹혀 살며 종일 가사 노동을 해야 하는 아이들, 마리 달린처럼 난민캠프에서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현지 단체와 협력하여 아동 학대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교실과 화장실을 짓고, 교사를 훈련하고, 현지어를 이용한 교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번역 고우현(커뮤니케이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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