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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타임라인을 훑어보다가 한 게시물에 눈길이 멈췄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딸의 출석번호가 ‘58번’이라 놀랐다는 한 학부모의 글이었다. 학생 수가 30명이 채 되지 않는데 어떻게 58번인지 궁금해서 딸에게 물어보니 그 학교는 남학생들은 1번부터 출석번호를 시작하고, 여학생들은 50번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난 설마 아니겠지 하며 이 게시물을 공유한 지인에게 물어보았다. “제 딸도 6년 동안 뒷번호로 생활했어요. 인권 감수성이 없는 엄마라 미안하네요”라며 자책했다. 초등학교 학부모인 회사 동료에게도 물어보았다. 동료는 자신의 아이가 몇 년째 31번이라며 여학생이라 30번부터고 이름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매기기 때문에 항상 1번이라 불만이 많다고 했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학교는 2년 전에 바뀌었어. 이전에는 남학생 먼저, 여학생 나중으로 하다가 이제는 1, 3, 5학년은 남학생이 1번, 다른 학년은 여학생이 먼저야”라고 했다.
실상이 궁금했다. 아쉽게도 전체 학교를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다만 2013년 경북지역 전체 초등학교 중 42%가 남학생 우선인 출석번호를 쓰고 있다는 한 경북도의원의 조사 결과가 있었다(나머지 58%는 여학생 우선이 아니라 남녀 구분 없이 이름 가나다순, 생년월일순 등 다양한 방식이다). 작년에는 전북도교육청이, 올해는 서울시교육청에서 출석번호 방식을 다양하게 적용하라고 권고하는 걸로 보아 여전히 그런 학교들이 있는 모양이다.
사실 이 문제는 하루 이틀 된 것은 아니다. 2001년 한 중학생이 성차별적인 출석부에 반발하여 당시 여성부에 진정을 넣은 일이 있었다. 2005년에는 한 학부모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어린 시절부터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한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가질 수 있다며 차별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권고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게 10년도 더 된 일이다. 대표적인 학교 내 성차별 사례로 알려진 문제인데 왜 이다지도 변화가 느린 걸까.
학교 현장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도 있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20년 전인 1997년부터 이미 초등학교 평교사 중 70%는 여성이었다. 당시 여성 교장은 5%가 안 됐다. 국가인권위의 권고를 받았던 2005년에도 여성 교장은 10명 중 1명을 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절반은커녕 10명 중 4명이 채 안 된다. 고등학교의 경우는 더 심한데 여성이 교장인 비율이 아직도 10%를 못 넘겼다.
언론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성차별 문제가 개선되고 있다고 한다. 여풍이라며 교사 임용시험을 포함한 각종 고시에서 여성이 두각을 나타낸 지도 오래다. 실패는 했지만 여성 대통령을 배출했고, 탄핵한 헌법재판관 가운데 한 명도 여성이었다. 역차별 이야기도 종종 들려온다. 많은 것이 빠르게 바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내면 성차별적인 출석번호를 그대로 사용하는 학교가 여전히 있고, 이전보다 여성의 진출이 많아졌지만 일정 장벽 너머로 가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치게 된다. 아마 이 정도가 진짜 우리 사회 분위기이고, 변화 속도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 다시 SNS로 돌아가 보자. 그 학부모는 이후 교장 선생님에게 직접 건의했고, 다른 방식으로 출석번호를 부여하겠다는 답신을 받았다고 했다. 느리지만 제대로 바뀌고 있다.
사실 아이들 입장에서야 출석번호가 어떻든, 교장 선생님이 누구든 크게 영향을 받진 않는다. 다만 아이들은 누구의 부모님이, 어떤 선생님이 이야기했는지, 선생님들 회의가 열리는지, 우리한테 물어보긴 하는지, 새로 오신 교장 선생님이 바꾸는지, 그럼 왜 지금까진 안 바뀐 것인지 등의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안다. 남학생 1번을 여학생 1번으로 바꾸는 식의 기계적인 균형이 아닌 진짜 변화는 분명 더딜 수 있다. 하지만 곳곳에서 현실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또 그 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권리옹호팀 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