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콕스바자르 난민 정착촌, 로힝야 난민아동의 하루
지난 2017년 8월 25일 이후 미얀마 북부에서 학살을 피해 로힝야족 약 67만 명 이상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도착했습니다. 그중 절반이 넘는 37만 명은 아동입니다.
고향을 떠난 지 6개월, 현재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 난민 전원 모두 식량 지원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특히 급성 영양실조 비율이 증가해 콕스바자르 인근 쿠투팔롱(Kutupalong) 난민캠프의 급성 영양실조 비율은 24%, 임시 주거지에서의 비율은 19.3%에 달합니다.
▲ 콕스바자르에서 살고 있는 6살 라마드,
고향에서 폭력을 목격한 후 먹고 말하길 멈췄으나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방글라데시에 있는 로힝야 아동 중 약 75%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콕스바자르 지역 주민 아동의 거의 절반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합니다.
파이살(Faisal)과 여동생 리하나(Rehana)는 콕스바자르 난민 정착촌에서 생활하는 로힝야 아동을 바탕으로 한 가상 인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두 남매는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막냇동생 아지자(Aziza)와 함께 텐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비록 이 남매는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이 아이들이 겪는 경험은 현실입니다.
▲ 콕스바자르 쿠투팔롱 캠프의 아이들
세이브더칠드런이 아동 200명 그리고 40명의 어머니들과 상담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파이살과 리하나 남매의 하루 이야기는 로힝야 아동이 가지고 있는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되었습니다. 이는 아이들이 과거 미얀마에서 보냈던 삶이나 현재 난민캠프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한 객관적 조사 결과는 아니지만, 이 가상 일기를 통해 현재 방글라데시에 거주하는 로힝야 난민 아동들이 적어도 지금은 ‘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난민 정착촌에서 보내는 삶이 실제로 어떤지 이해하시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오전 5시 12분 – 파이살
텐트 밖은 여전히 어둡고, 아직 눈을 뜨고 싶진 않습니다. 다시 잠에 들려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돌아누워 봅니다.
▲ 아메드와 같은 로힝야족 난민 아동들은
대나무와 비닐로 만들어진 좁은 텐트에서 생활합니다.
바닥은 단단하고, 누워서 편히 잠들 수 있는 매트리스 같은 것도 없습니다. 바닥에 깔린 비닐 시트 아래로 차가운 진흙이 느껴집니다. 텐트 벽 한쪽에 난 구멍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들어옵니다. 이전에 이 구멍을 나뭇잎으로 막아보려고 했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눈을 꼭 감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옷과 담요가 더 있었으면…’ 하고 빌어봅니다. 최근 들어 밤이 유독 더 추워졌습니다. 뼈가 쑤시고 허리도 아픈데, 저는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누워 떨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엄마에게 더 가까이 붙어 온기를 느껴보려 애씁니다.
옆에서 엄마와 두 여동생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의 느린 숨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옵니다. 우리 가족 모두가 이 텐트에서 같이 지내기에 텐트는 너무도 작습니다.
오전 6시 30분 – 리하나
엄마는 다정하게 저와 제 여동생을 깨운 뒤 씻고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보통은 아침을 먹는데 오늘은 남은 음식이 없어서 못 먹었어요.
▲ 콕스바자르 난민 캠프의 열악한 모습
저는 동생과 씻으러 나왔고, 우린 텐트 옆에서 응가를 했어요. 우리는 공중 화장실이나 씻을 수 있는 수돗가에 잘 가지 않아요. 화장실 가는 걸 남자들이 보는 것도 불편하고 여자들이 몸을 가리고 안전하게 씻을 수 있는 공간도 없기 때문이에요.
▲ 콕스바자르 벌마파라(Burmapara) 캠프에서 동생을 안고 있는 여자아이
여동생과 저는 텐트 밖으로 나가는 것도 겁이 나요.
사람들은 우리 캠프에 유괴범이 있다고 말해요. 전 이 얘기가 너무 무서워요. 다른 남자애들도 모두 무서워하는데 아무도 아이들을 데려가는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요.
오전 7시 9분 – 파이살
텐트를 나와 조금 걷다가 드디어 화장실에 가는 걸 성공했습니다. 이 화장실은 무지 더럽고, 냄새가 많이 납니다. 오늘은 사람이 북적이는 걸 피할 수 있길 빌었는데, 이렇게 이른 아침 시간에도 화장실엔 사람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 저는 음식을 받아야 해서 씻을 시간은 없습니다. 제일 마지막으로 온몸을 씻은 게 며칠은 됐고, 팔이랑 가슴이 다시 가렵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먼지투성이고 옷에는 모래가 묻어있어 피부가 따갑기도 합니다. 내일은 씻으러 갈 수 있길 바라봅니다.
오전 10시 14분 – 파이살
물품 배급소에는 항상 기다리는 줄이 깁니다. 캠프에 있는 모두가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임신한 아주머니가 줄을 서 있을 때도 있습니다.
▲ 콕스바자르 난민 캠프에서 배급을 받으려 줄을 서 있는 로힝야족 난민들
저는 그래도 배급소에서는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구호단체에서 온 사람들은 저희에게 아주 친절하고, 모두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글라데시 군대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 배급소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지 않는 건 물품을 받는 줄에서 많은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는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 너무 가깝게 붙어 줄을 서 있어 저와 계속 부딪힙니다.
정오 12시 36분 – 리하나
아빠와 오빠가 음식을 받아서 온 뒤, 엄마랑 여동생과 같이 점심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여기서 주로 쌀과 렌틸콩 그리고 감자를 먹어요… 예전에 집에서 주로 먹던 음식과는 아주 달라요. 쌀과 콩 맛이 특히 다르고, 고향 집에선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고기와 생선, 채소랑 과일을 먹을 수 있었어요.
저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게 좀 걱정돼요. 최근 들어 힘도 없고 자주 아팠어요. 2주 전부터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더 심해졌어요.
▲ 콕스바자르 벌마파라 캠프에서 물을 받고 있는 아이들
아마도 여기 캠프 환경 때문인 것 같아요. 텐트 바깥엔 쓰레기가 널려있고, 공기에서도 이상한 냄새가 나요. 캠프 내 길거리도 더럽고 먼지투성인데 비가 오고 나면 완전 심하게 질척질척해져요.
오후 1시 31분 – 파이살
점심을 먹고 난 다음, 어두컴컴한 텐트 안에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이럴 때면 저는 우리 가족의 삶이 전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하곤 합니다.
방글라데시로 떠나오기 전, 우리는 마을에서 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논에서 일하셨고 삼촌은 작은 상점을 운영하셨습니다. 여동생들과 저는 종종 논이나 삼촌 가게에 가서 일을 도와드리곤 했죠. 엄마 없이도 슈퍼에 갈 수 있었고, 바깥에서도 많이 뛰어놀았습니다.
▲ 콕스바자르에 있는 세이브더칠드런 보건소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놀 수 있는 곳도 없고 장난감도 하나 없습니다. 저는 여동생들과 텐트에 앉아 병뚜껑이나 숲에서 주워온 작은 막대기를 가지고 놀곤 합니다.
저는 여기서도 공부를 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엔 아주 어린 아이들을 위한 학교 밖에 없고, 제가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책이나 펜 하나 가지고 있는 게 없습니다.
종종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듣고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슬퍼집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미얀마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말하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싸움이 멈췄으면 좋겠습니다. 미얀마에서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후 2시 24분 – 파이살
기도가 끝나고 땔감을 주우러 숲으로 긴 여정을 떠납니다.
땔감을 구하려면 신발도 없이 맨발로 언덕을 걸어서 넘어야 합니다. 돌 때문에 발이 많이 아픈데 어떤 때는 미얀마에서 며칠을 걸어 고향에서 도망쳤을 때처럼 발에서 피가 나기도 합니다.
보통 장작용 땔감을 구하러 다니는 것은 남자아이들입니다. 여자아이들이 숲에서 성희롱을 당하거나 강간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얘기를 부모님들께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여동생들도 숲에 땔감 구하러 가는 것을 아주 무서워합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저도 숲에 가는 것이 무섭습니다. 숲에는 코끼리나 뱀 같이 야생 동물들이 있어 위험하고, 특히 코끼리 때문에 사람들이 죽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또, 우리 남자아이들도 숲에 갈 때면 어떤 사람들한테 맞거나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럴 때면 미얀마에서 경험했던 것들이 떠올라 또 슬퍼집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나를 원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듭니다.
▲ 콕스바자르에서는 로힝야 난민 아동이 땔감을 들고 다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땔감을 찾으면 저는 캠프로 돌아와 우리 가족이 있는 텐트로 들어갑니다. 숲에서 주운 장작들이 무거워 돌아오는 길은 늘 가는 길보다 더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보통 오전에 땔감을 구하러 갑니다. 그래야 해가 지기 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오후 4시 40분 – 리하나
파이살 오빠가 곧 땔감을 가지고 집에 올 거예요. 벌써 날이 어두워졌어요.
해가 지면 우리는 텐트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텐트 밖은 위험하기 때문이에요.
▲ 10살 아메드는 할머니가 함께 살고,
이웃에 사는 5살 니라는 트라우마로 말하고 걷는 것을 멈췄습니다.
캠프 주위에는 불빛이 없어 길을 잃어버리기 아주 쉬워요. 밖에 있으면 우리가 캠프 어디쯤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죠. 전에 우리 이웃 텐트에 강도가 든 적이 있는데 우리 텐트 문을 어떻게 잠글 방법도 없어요. 그래서 저는 밤마다 유괴범이나 도둑들이 올까 봐 겁이 나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해요.
저랑 제 여동생은 이제 저녁밥 준비를 시작해요. 저녁 메뉴는 점심이랑 똑같이 밥과 렌틸콩이에요. 밖에는 요리할 만한 곳이 없어 텐트 안에서 식사 준비를 하는데 아무리 텐트를 열고 환기를 시키려 해도 연기가 텐트 안에 그대로 남아 계속 기침이 나요.
오후 6시 35분 – 리하나
기도 시간은 제게 평화로운 순간이에요.
▲ 콕스바자르에서 사는 사지다는 미얀마에서 지냈던 날들을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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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의 마지막 기도 시간이 되었어요. 긴 하루가 끝나고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모이는 시간이죠. 좁은 텐트에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 오빠와 여동생 그리고 제가 모두 모이면 아빠가 기도를 이끌어요. 자리가 별로 없어 기도를 시작하면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저희 자매는 꼭 붙어 앉아요.
기도에 나오는 익숙한 단어들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그리고 우리 가족이 같이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답니다.
우리 가족은 다 함께 많은 것들을 겪었고 지난 기억 속엔 슬픔이 가득해요. 그래도 더 나은 삶에 대한 우리 가족의 신념은 더 강해졌어요. 언젠가 집에 돌아가 자유롭게 살고, 우리가 믿는 종교를 걱정없이 믿으며, 공부하고 또 공동체에 헌신하는 그런 미래가 올 것이라고 믿어요. 이런 것들이 바로 제가 기도할 때 신께서 들어주시길 바라는 것들이랍니다.
글, 번역 김도화(마케팅커뮤니케이션부)
■ 세이브더칠드런은 방글라데시에서 로힝야 아동들과 가족들이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받을 수 있도록 밤낮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들을 위해 식량을 배급하고, 주방용품이나 거주지 물품, 위생용품 등의 비(非)식량 물품 또한 분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캠프와 주거지에서 꼭 필요한 오솔길이나 다리 같은 기초시설도 설립하며,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시고 위생관리를 할 수 있도록 위생급수 시설도 설치했습니다.
▲ 4-14세 아동들이 국어와 산수를 배울 수 있는 세이브더칠드런 교육 센터
어떤 아이라도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저희 세이브더칠드런은 또한 아동친화공간을 설립하고 모든 아이들을 포함하는 교육 센터를 만들어 훈련받은 교사를 파견했습니다. 현재 약 100개가 넘는 교육 센터를 운영해 아이들이 모국어로 공부할 수 있게 하고, 86개의 아동친화공간에서 아이들은 안전하게 시간을 보내며 심리적으로 안정될 수 있게 돕습니다.
▲ 세이브더칠드런 아동친화공간에서 놀고있는 로힝야 난민 아동들
덧붙여, 로힝야 가족들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와 영양 지원, 심적 외상을 입은 아이들을 위한 심리사회적 지원도 실시합니다.
이렇게 세이브더칠드런은 지금까지 아동 약 35만 8천 명을 포함해 63만 7천 로힝야 난민들을 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