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펀딩] 1화. 2년 간 미끄럼틀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요 | 작성일 : 2015-06-16 조회수 : 9400 |
2년 간 미끄럼틀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요 “놀이터요? 저는 2년 동안 미끄럼틀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어요. 몇 년 전에 근처 놀이터에 있던 놀이기구가 다 없어졌거든요. 안전 때문이라고 하던데…… 학교 운동장에도 놀이기구가 없어요. 그래서 골목길에서 노는데, 어른들이 막 시끄럽다고 하셔서 갈 데가 없어요. 주말에는 부모님께서 일을 하셔서 멀리 놀러 가지도 못해요. 얼른 놀이터가 생겼으면 좋겠어요. 미끄럼틀을 맘껏 타고 싶어요.” 세이브더칠드런이 서울의 한 자치구에서 도시 놀이터 개선사업을 시작하기 직전, 지역조사과정에서 만난 초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대도시인 서울에 사는 아이의 이야기라는 게 믿겨지시나요? 놀이터가 철거된 지 2년이 지난 이 동네는 집집마다 자전거도 있고 분명 아이들이 사는 것 같은데 조용했습니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도시의 놀이터 – 폐쇄되고, 위험하고…… 아파트 단지를 지날 때 종종 테이프가 칭칭 감겨진 놀이터를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관리법이 정한 안전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놀이터들이 올해 초, 한꺼번에 폐쇄된 것이죠. ‘사용 금지’ 팻말과 함께 아이들의 접근을 막고 방치된 놀이터가 현재 전국에 1447개 (4월말 기준, 국민안전처) 입니다. 주로 오래된 주택단지 내 놀이터들인데 주민들은 수리비용이 없다는 이유로, 정부는 민간시설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들의 안전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놀이터를 흉물스럽게 내버려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폐쇄되지 않은 놀이터는 아이들에게 안전한 공간일까요? 최근 서울 강남구에서 만난 12살 여자 아이는 놀이터에 가기 꺼려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습니다. “놀이터에서 아저씨들이 술 마시고 담배 피워서요. 술 마신 사람들이 놀이터에 누워 있으면 놀기 불편하고 냄새도 싫어요. 한 번은 우리가 놀고 있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너 이리 와 봐’ 한 적도 있었어요. 한 번 그런 거 겪고 나면 놀이터에 가기도 진짜 무서워요.” 이 아이의 말처럼 아이들이 놀이터를 ‘안전하지 않다’고 느낄 때 그 이유는 곧잘 놀이기구보다 놀이터를 둘러싼 환경일 때가 많습니다. 놀이기구의 안전이 곧 놀이터의 안전을 뜻하지는 않는 거죠. 세이브더칠드런이 도시 놀이터 개선사업을 하면서 만난 주민들 역시 놀이터의 위험 요소로 놀이 기구뿐만이 아니라 자동차가 질주하는 놀이터 주변 도로, 놀이터를 배회하는 노숙자, 인근 퇴폐 유흥업소, 매연 등을 위험 요소로 꼽았습니다. 농어촌의 놀이터 – 산과 들에서 뛰어 놀면 된다고요? 뛰어다닐 거라는 목가적 상상과 달리 농어촌의 많은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면 집에서 혼자 논다고 합니다. 혼자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 게임을 하는 것이죠. 지난해 세이브더칠드런이 농어촌아동권리 실태 조사를 하면서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동네에 친구들도 없고, 갈 데도 없어서 그냥 집에서 놀아요” “집에서 혼자 놀 때 외로워서 가장 싫어요.” “동네에는 놀 친구도 없고, 집 뒤가 산인데 무서워서 못 올라가요. 놀려면 자전거 타고 큰 길 건너서 15분쯤 가면 친구 한 명이 있는데, 주말에나 그렇게 하는 거죠. 수업 끝나면 학교에서 놀고 싶어도 시간이 안 돼요. 집에 가는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밖에 안 오니까 놓치면 안 되잖아요. 버스 기다리며 잠깐 친구들과 노는 게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에요.” 도시보다 너른 공간이 있어도 친구들이 없으면 놀기 어렵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이내 띄엄띄엄 떨어진 마을로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아이들이 집 이외에 가장 자주 노는 곳은 각자 사는 마을의 회관 주변입니다. 이곳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지만 마을회관의 어르신들에게서 시끄럽다고 놀지 말라는 소리를 듣기 일쑤입니다. ‘영양실조’ 못지 않은 ‘놀이 실조’ 도시에선 ‘실컷’ 놀기 어렵고 농촌에선 ‘함께’ 놀기 어렵습니다. 각각 다른 문제를 갖고 있지만 바탕은 비슷합니다. 아이들의 바람이 담긴 놀이공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올해 초, 세이브더칠드런은 18세 이하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정부가 충분히 예산을 쓰지 않는 아동 권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설문에 응한 425명 중 54.6%가 ‘안전한 장소에서 놀 권리’를 지목했습니다. 한 아이는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놀이터가 낡고 놀 곳이 없어 주차장에서 놉니다. 놀이터와 공원, 쉼터를 충분히 마련해서 돈을 내고 트램폴린이나 PC방을 가지 않아도 되는 때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보건복지부의 아동종합실태조사에 따르면 대한민국 아동 3명 중 1명은 하루에 30분 이상 놀이(운동)를 하지 못합니다. 아동의 절반은 방과후 하고 싶은 활동으로 ‘친구들과 놀기’를 꼽았지만 실제 방과 후 친구들과 노는 아이는 5.7%에 불과합니다. 놀 수 있는 시간과 공간과 관계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 걸까요? 영양실조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충분히 놀지 못하는 ‘놀이실조’도 아이들을 시들게 합니다. 아이들이 바라는 공간, 즉 집에서 5분 안에 갈 수 있는 놀이터, 자동차 걱정 없이 뛰어다닐 수 있는 골목길, 햇빛과 비를 피해 쉴 수 있는 쉼터는 비단 아이들에게만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아동권리와 마찬가지로 놀 권리는 우리 사회 대부분 구성원의 인권의 척도입니다. 동네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 그곳은 우리 모두에게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글 고우현(커뮤니케이션부), 제충만(권리옹호부)_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