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더칠드런 홍보대사 박경림, 박정훈 부부가 지난 1월 30일 5박 6일 일정으로 네팔의 데비스탄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데비스탄 지역의 안나푸르나 중등학교는 세이브더칠드런과 현지의 파트너 기관인 GYC가 2009년부터 아동의 권리 증진과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지원하고 있는 곳입니다. 박경림, 박정훈 부부의 특별하고 감동적인 네팔 방문기를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사진: 강민구 작가 / 글: 김민주 기자 (여성중앙)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라고 인사를 하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활짝 웃으며
‘나마스테’라고 답한다. 안나푸르나 산맥을 마음껏 뛰노는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가
오래도록 기억될 5일이었다.
사진/ 박경림・박정훈 부부가 신축 교실 벽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
네팔에서는 보통 건물을 반반 나눠서 다른 색깔을 칠한다.
하늘 아래에서 만난 아이들
지난 1월 30일 5박 6일 일정으로 박경림・박정훈 부부와 네팔의 데비스탄 지역을 다녀왔다.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리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 네팔까지는 비행기로 총 7시간 거리였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다시 국내선을 타고 우리로 치면 부산과도 같은 제2의 도시인 포카라로 이동했고, 흙먼지로 뒤덮인 거친 산길을 8시간 동안 차로 달린 후, 다시 3시간의 등산을 해야 했다. 이틀 동안 꼬박 스무 시간이 걸려 하늘과 가장 가까운 학교인 네팔 안나푸르나 중등학교에 닿았으니 아이들을 만난 감격은 클 수밖에 없었다. 오르고 보니 해발 2500미터(한라산이 1950미터이다)란다. 그러니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함께 오른 네팔인은 “이 정도는 낮은 동산”이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 껄껄 웃었다. 안나푸르나 중등학교에 한국인이 방문한 것은 공식적으로 우리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곳 사람들은 예상보다 힘겨웠던 산행을 하느라 지치고 땀범벅이 된 이방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며 티카(빨간 가루)를 이마에 발라주고, 카다(하얀 천)를 목에 걸어주었다. 사실 박경림은 지난해 10월, 임신 6개월에 접어든 둘째 아이를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소식을 접한 기자는 지난봄에 그녀의 임신을 축하하며 나눈 통화에서의 밝은 목소리가 떠올라 가슴 끝이 묵직해졌다. 지난 연말 무렵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른 그녀는 기자에게 봉사 활동 이야기를 건넸다. 그간 말로만 ‘나눔과 도움’에 대해 생각했는데, 이번에야말로 몸소 경험해보고 싶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에 여성중앙은 그녀가 7년간 홍보대사로 활동해온 세이브더칠드런에 이 같은 내용을 전달하며 함께 갈 곳을 찾아보자고 했고, 2009년부터 이 단체가 후원을 하고 있는 네팔 데비스탄의 안나푸르나 중등학교를 행선지로 결정했다. 박경림의 남편 박정훈씨도 우리의 프로젝트에 함께하고 싶다며 일주일간 회사에 휴가계를 제출했고, 그녀의 조카 이주원(16) 양도 방학을 마무리하며 의미 깊은 일을 하고 싶다고 동행했다.
“결혼 후 부부가 함께 매체에 나가는 건 처음이에요. 남편이 일반인이다 보니 사생활을 지켜주고 싶었거든요. 이번엔 무척 뜻 깊은 일이기에 부부가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아서 동행하기로 했어요. 남편이 회사 일로도 바쁜데 흔쾌히 가겠다고 해서 고마웠죠.”
사진/ 마을에 도착한 순간부터 아이들은 부부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박경림 부부가 방문한 데비스탄은 네팔의 바그룽 지역에서도 제일 외진 마을로, 아직까지도 인도에서 유래한 카스트 제도가 강하게 남아 있어서 소외된 이들이 특히 많이 사는 곳이다. 네팔의 계급 체계로 따지자면 하층민의 비율이 높아 경제 수준도 낮은 편이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심해서 딸은 학교에 보내지 않거나 일찍 결혼을 시키고, 생리를 할 때는 청결하지 못하다고 생각해 가축과 함께 자게 하는 등의 악습이 상당 부분 남아 있기도 했다.
안나푸르나 중등학교는 지난 1989년에 지역 주민들과 군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설립한 학교로 세이브더칠드런과 현지의 파트너 기관인 GYC는 2009년부터 아동의 권리 증진과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지원을 해오고 있다. 가난과 차별을 더 이상 대물림할 수 없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만든 만큼 학교에 대한, 학생들을 향한 주민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설립 초기에는 5학년까지만 운영하다 지금은 8학년(12세)으로 확대했고(네팔은 5세 때 학교에 입학한다), 최근엔 유아원 운영도 시작해 배움의 기회가 많아졌다며 타라바하둘 교장은 기쁜 마음을 환영사에 담았다.
사진/ 아이들은 매일같이 2시간이 넘는 산길을 오르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밝은 표정이 인상적인 네팔의 어린이들.
사실 그동안은 교사 수도 턱없이 부족했고 제대로 된 교실이나 교보, 기자재등이 없어서 학교를 다녀야 할 나이의 아이들 중 일부만 수용할 정도로 환경이 열악했다. 하지만 지난 4년 사이 세이브더칠드런과 정부의 지원으로 교사를 충원하고 교실도 새로 증축하면서 학생 수를 늘릴 수 있었고 학업 성취도도 높아졌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오랜 내전을 겪은 네팔은 발전 속도가 더딜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데비스탄은 아이들의 교육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꿈꾸고 있는 듯했다. 어른들의 뜨거운 열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나푸르나를 놀이터 삼아 마음껏 뛰어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순수하고 맑은 눈망울은 백마디 말보다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사진/ 안나푸르나 마을 사람들이 박경림 이마에 발라준 빨간 가루는 티카로, 환영의 의미가 담겨있다.
사진/ 마을 사람들이 전통 악기 연주로 일행을 반겼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다
출국 전 공항에서 만난 박경림은 “어제 밤새 짐을 싸느라 잠을 설쳤어요. 그래도 아이들을 만날 설렘에 피곤한 줄도 모르겠어요”라고 했다. 이어 그녀는 시어머니가 아침 대용으로 먹으라고 싸준 떡을 기자와 일행에게 돌리면서 살뜰히 ‘왕언니’ 역할을 시작했다.
부부는 출발하기 전 2주간에 걸쳐 여러 문구점과 마트를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을 샀다. 그리곤 기내에 실을 수 있는 짐과 한 사람이 화물로 부칠 수 있는 양을 체크해 총 100kg의 선물을 일일이 박스에 포장해 가져왔다. 학용품과 생필품이 많이 부족하다는 현지 정보를 전해 듣고 학생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는 부부는 우선 공책, 연필 등 기본적인 필기구를 비롯해 축구공, 줄넘기, 탁구 라켓과 공, 장난감, 블록 등을 준비했다. 현지에 도착한 뒤 짐들을 풀어보니 포장 상자를 뜯어 부피를 최대한 줄이는 등 하나라도 더 가져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들이 네팔로 봉사 활동을 떠난다는 사실을 안 주변 지인들의 도움도 줄을 이어 치약, 칫솔, 비누, 면 생리대(이곳은 여성용품이 비싸서 제대로 착용하는 이가 드물다), 장난감, 화장품 등의 기증품도 많았는데 모두 가져올 수 없어 안타까웠단다.
“어젯밤에 남편이랑 밤새 짐을 ‘쌌다 풀렀다’ 했어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담을 수 있을까 연구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이더라고요(웃음). 남편은 선물을 박스에 넣은 다음 무게를 재느라 계속 저울에 올리고 내리고 해서 팔이 엄청 아플 거예요. 아이들을 돕는 데 쓴다고 하니까 기꺼이 물건을 내어준 지인들이 많아서 정말 감사했어요. 어떤 분은 일단 당장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면 나머지는 현지로 배송해주겠다고도 하셨죠. 고생스럽긴요. 아이들과 동네 주민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사진/ 데비스탄 아이들과 주민들은 순수하고 맑은 눈망울로 타지에서 온 일행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이들이 3시간의 산행 끝에 안나푸르나 중등학교에 도착하자 작은 마을이 들썩일 정도로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주민들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학교로 몰려들었다. 까만 교복에 원색의 귀여운 머리끈을 한 아이들이 운동장에 줄을 맞춰 앉아 한국에서 온 낯선 이방인을 반겨주었다. 아이들이 직접 색종이를 접어 만든 꽃길을 따라 걷자 부부에게 티카, 말리(작은 꽃), 카다가 전해졌다. 몇몇 여학생은 스스로 개사를 했다며 수줍게 ‘환영송’을 불렀고 동네 어른들은 전통 악기를 연주하면서 반겨주었다. 어느새 박경림의 볼에는 눈물이 타고 흘렀다. “생각보다 힘들게 산을 올라 겨우 마을에 도착했는데, 우리를 마중 나온 마을 어른들, 환하게 웃어주는 아이들, 수줍워하면서도 우리 곁에 몰려드는 동네사람들을 보며 감동했어요.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환대를 해주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북받치더라고요. 정말 고맙잖아요. 해준 것도 없고 그냥 아이들을 만나러 온 것인데, 이렇게까지 반겨주니 말이에요. 그 아이들을 보는 순간 ‘어깨가 더 아프더라도 선물을 더 많이 가지고 올 걸…’ 싶은 마음에 미안해지더라고요.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교정 가득 모인 사람들의 풍경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부부는 교장 선생님과 세이브더칠드런의 현지 매니저인 라젠드라의 안내를 받으며 서둘러 아이들을 만났다. 학년별로 한창 오전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저학년 교실에는 책걸상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들은 옹기종기 조별로 모여서 바닥에 엎드린 채 그림을 그리거나 숫자를 익히고 있었다. 전기시설도 부족해서 창을 통해 비치는 채광에 의존하는 교실은 꽤 어두웠지만 아이들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넘쳐났다. 한 교실에서는 컴퍼스를 이용해서 원을 그리고 시간 개념을 익히는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기특하게 지켜보던 박경림은 “좀 더 다양한 교육 자재와 학습 방법이 전달되면 좋을 것 같다”며 아이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찬찬히 살펴보았다. 고학년 교실에 가서는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아이들을 위해 박정훈씨가 즉석에서 교사가 되어 칠판에 세계 지도를 그린 후 네팔과 한국의 모습, 거리등을 설명해주었는데, 아이들이 “네팔을 너무 작게 그렸다”고 장난스럽게 지적을 해 한바탕 웃음이 터지기도 했다. 안나푸르나 중등학교의 모습은 마치 우리나라의 1960년대 교실 풍경을 연상시켰다. 아직 부족한 것들은 너무나 많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모습, 개구쟁이들의 발랄함으로 생기를 띠는 것까지.
사진/ 네팔인들은 보통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자식을 낳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학생의 수가 많다.
사진/ 안나푸르나 중등학교에서는 별다른 교육없이 지내는 5세 미만의 아이들을 위해 얼마 전부터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교실을 둘러본 후에는 학생들과 함께 지난해 완공된 신축 교실의 벽과 문에 페인트칠을 했다. 네팔 사람들은 유난히도 원색을 선호했다. 그들이 걸친 스카프나 옷, 집의 색깔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컬러풀 네팔’에 매료된 건 기자뿐만이 아니었다. 새 교실의 벽과 문 색깔로는 시원한 바다를 연상시키는 진한 파랑이 선택되었는데, 우리가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려는 동네 주민들이 잔뜩 몰려들어 작업 현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이어 준비해 온 선물을 꺼내놓으면서 용도를 설명해주자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마을 어른들은 연신 감사 인사를 전하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가장 인기가 높았던 것은 의외로 폴라로이드 사진이었다. 어른과 아이를 막론하고 가히 폭발적인 반응을 보였다. 혹시 몰라 폴라로이드 사진기와 필름 60장을 준비해 왔다는 부부는 아이들의 사진을 직접 찍어주며 잊지 못할 추억을 선물했다. 폴라로이드 사진을 처음 보는 아이들은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필름을 앞뒤로 돌려보다가 이내 자신의 얼굴이 필름에 나타나자 무척 좋아하며 옆 사람에게 자랑을 했다. 마치 슈퍼스타를 팬들이 감싸듯, 부부 곁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자기 아이의 사진을, 혹은 자신의 얼굴을 찍어달라고 했다. 박정훈씨는 폴라로이드 사진의 인기에 기뻐하면서도 좀 더 세심하게 준비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무척 안타까워했다. 그는 처음엔 낯설어서 머뭇거리던 아이들이 사진을 찍어달라고 용기를 내서 왔는데도 필름이 다 떨어져 찍어주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미안했다고 했다.
사진/ 박정훈씨는 민준이가 크면 아들과 함께 이곳에 꼭 다시 오고 싶다고 했다.
“학교를 방문한다고 하기에 아이들에게 필요한 학용품이나 생필품을 선물하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깊이 고민해서 아이들의 기억에 남는 선물을 더 많이 가져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후회가 남더라고요. 전교생이 300명이니까 모든 아이의 얼굴을 다 찍어줄 수 있게 힘들더라도 가방에 필름 300장을 가득히 챙겨 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어요. 아내도 그 부분을 많이 안타까워했고요. 이곳의 모든 아이에게 우리가 머물렀던 시간을 사진으로 남겨주면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을 테니까요. 네팔 사람들은 우리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주기 위해서 이것저것 참 많이 준비했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맘이 많이 쓰여요.”
이날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네의 아기들에게도 작은 선물이 전달되었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진행하고 있는 ‘신생아살리기 모자뜨기캠페인’을 통해 모인 정성이 가득 담긴 모자를 아기들에게 씌워준 것이다. 네팔은 일교차가 심하고 집 안에 난방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서 밤이면 무척 쌀쌀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거의 대부분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특히 한 살 미만의 아기들에게 모자는 필수품이었는데, 한국 사무실에 전달된 모자 가운데 특별히 예쁜 것들을 선별해서 가져왔고 박경림 부부는 직접 아기들에게 이를 씌워주면서 건강하고 밝게 자랄 것을 바랐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 기산뿐을 데리고나온 엄마 수실라뿐은 “모자가 정말 예쁘고 아기에게도 잘 어울려서 행복해요. 이렇게 먼 곳까지 우리를 위해 와줘서 감사해요”라며 수줍게 말했다.
이방인도 포근히 안아주는 네팔 사람들의 넉넉한 품…
박경림 부부는 내내 “도움을 주려고 온 우리가 오히려 더욱 큰 사랑과 대접을 받고 가는 것 같아 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특히 박정훈씨는 “순수한 사람들을 만나서 그런지 네팔이라는 나라 자체가 좋아졌어요. 외국인인 우리를 낯설어하면서도 ‘나마스테’ 하고 인사를 하면 해맑게 웃으면서 받아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라고 했다. 학교를 방문해서 준비해 온 선물을 나눠주고,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일정만 예상했던 부부에게 마을 사람들은 더욱 뜻깊은 시간을 마련해두었다. 학생은 물론이고 어른들이 모두 나서서 전통 춤과 노래, 공연 등 한바탕 축제를 벌인 것이다. 공연 내용에 어울리는 의상을 통일해서 입은 것은 물론이고, 주술적인 몸짓과 독특한 몸짓이 결합된 일종의 ‘댄스컬’도 선보였다. 학교 옆 공터에 가득 몰려든 마을 사람들은 ‘네팔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고 용맹하다’ ‘이곳은 부처가 태어난 곳이라 평화롭다’ 등 네팔의 전통과 자부심이 담긴 노래를 들려주면서 자신들의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고자 했다. 흥이 돋자 마을 사람들은 전통 악기 연주에 맞춰서 함께 춤을 추자고 부부의 손을 이끌었다. 박경림 부부는 멋진 노래(박경림의 불후의 명곡인 ‘착각의 늪’이 안나푸르나 산등성이에 울려 퍼졌다!)와 함께 귀여운 율동을 선보여 마을 사람들에게 큰 웃음을 안겨주었다.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난 후에는 현지인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집주인은 우리를 위해 귀한 버펄로 우유를 끓여오고, 웬만해서는 잘 먹지 않는 비싼 사과와 토마토 등을 식사 때마다 접시에 담아냈다. 난방이 되지않는 집이라 밤이 되니 스산했지만 그들이 준비해준 따뜻한 새 이불을 덮고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세수를 하러 가는 길에 손님들에게 방을 내주느라 할아버지와 아이들이 추운 날씨에도 흙마루에서 새우잠을 청했다는 것을 전해 듣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꼈다.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네팔 사람들이 보여준 따뜻하고 진심 어린 환대를 떠올리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사진/ 홈스테이를 하게 된 집에서 한국 음식을 선보이기 위해 비빔국수를 만든 박경림.
그 맛은? 비밀로 하자.
아이 떠나보낸 후 깨닫게 된 진정한 사랑…
부부와의 정식 인터뷰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진행됐다. 네팔로 봉사 활동을 오게 된 계기부터 되짚다 보니 그동안 굳이 말하지 않았던 ‘아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었다. 박경림은 임신 6개월이던 지난해 10월 별다른 징후 없이 갑자기 양수가 터지는 조기 양수 양막 파열로 아이를 잃었다.
박정훈씨는 “우리에게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작년에 민준이 동생이 먼저 하늘로 갔잖아요. 그 동안은 누군가가 좋은 일을 한다면 같이 돕고 싶다는 생각 정도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직접 실천을 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비록 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나눌 수 있다면 더 많은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욱 좋은 것을 누릴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박경림은 어느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7년째 세이브더칠드런 홍보대사로 활동하면서 신생아를 살리기 위해 모자 뜨기를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했잖아요. 그동안은 ‘가슴’보다 ‘머리’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아이를 그렇게 잃고 나니까, 모자를 떠서 정말로 아기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백 개도 천 개도 뜰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아픈 일을 겪으면서 남편이랑도 이런 말을 많이 했어요. ‘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도울 수 있는 진심이 생겼다’고요. 사실 정말 마음이 아픈 시간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얻은 것도 많아요. 제가 그런 일을 겪자 자신도 유산을 한 경험이 있다고 고백하면서 위로를 해주는 주변 분들이 많았거든요.
정말 친한 사람들이었는데 그전엔 그런 아픔을 갖고 있는지 몰랐었죠. 그래서 ‘사람들이 겉으로는 다 웃고 있지만, 마음속엔 저마다의 사정이 있구나’라고 느끼면서 다른 사람들을 더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라던 박경림은 “우리 아이였지만, 우리 부부와의 인연이 거기까지였다고 생각해요…. 지금은요”라며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인터뷰 내내 기자와 부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이야기를 하다 말다 몇 번을 쉬어야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 부부는 기분 좋은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마을에 도착한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은 지속적으로 ‘학교에 컴퓨터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처음에 부부는 자신들이 필요한 ‘물건’을 너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당황했지만 곱씹어 생각하면서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고 했다. 박정훈씨는 “우리가 마을에 머문 시간은 고작 하루였잖아요. 마을 어른들은 그만큼 절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부모 세대처럼 가난하게 농사를 짓거나 관광객들의 짐을 들어주는 포터 일을 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교육이 필요하고, 그중에서도 컴퓨터를 다룰 수 있다면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일 거예요. 컴퓨터는 사주고 싶은데 경제적인 여건이 안 되니까 우리에게 말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게 있다면 뭘 해서라도 가져다 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저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라 그런지 생각할수록 그 마음이 느껴져서 더 가슴이 아프더라고요”라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 부부는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며 지금의 마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남편은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하고 박경림은 2월 20일부터 JTBC의 주부 대상 아침 토크쇼인 ‘박경림의 오! 해피 데이’(월~목 오전 11시)를 진행하기 위해 바쁜 일상을 준비해야 했지만, 이들은 이번 봉사 활동을 통해서 얻은 에너지와 타인을 향한 관심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열심히 살고 싶다고 했다.
네팔에서의 시간들을 기록한 메모와 사진들을 뒤적이던 기자는 박경림이 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온몸이 사방팔방으로 흔들려 일명 ‘댄싱 로드’라 불린다는 거친 비포장 산길을 차로 달리던 중이었다.
“우리가 네팔에 온 건 ‘마크툽’ 같아요『연금술사』에 나오는 말로 ‘결국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됐었던 것이다’라는 뜻이죠.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예요. 우리가 지금 네팔에 함께 있으면서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것, 지금 함께 웃을 수 있는 것, 전부 다 ‘마크툽’이에요. 인생은 이래서 참 감사한 것 같아요!”
사진/ 일행은 현지 가정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데비스탄 주민들의 친절과 배려에 감동했다.
해외아동교육지원
네팔 아동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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