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를 떠나며 2012년 7월 이라크가 시리아 난민들에게 국경지대를 개방했다는 이메일을 받았습니다.그 순간 저는 머리 속으로 이라크 내 시리아 접경 지대인 안바르(Anbar) 주 내 알 카엠(Al Qaem) 이라는 지명을 생각해 내려고 애썼습니다. 제가 이달 초 처음으로 이곳을 떠나 경호를 받지 않고 도보로 그곳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알 카엠은 바그다드에서 시리아 국경까지 서쪽으로 펼쳐진 거대한 사막지역입니다. 알카엠의 주요 도시인 팔루자(Fallujah)와 라마디(Ramadi)는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라크에 주둔했던 미군과 반군 간의 격렬한 접전이 있었던 곳의 지역이 바로 그곳입니다. 다수의 이슬람 수니파가 거주하는 안바르 주는 강력한 종족 중심의 위계 구조, 유프라테스(Euphrates)강, 무장반군의 집합소로 알려진 곳입니다.
이 지역으로 방문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팀에게 넌지시 말하자 팀원들은 처음에는 별 문제 없다는 듯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팀원들은 외국인인 내가 장거리 여행을 하겠다고 한 사실에 내심 놀랐고 두렵기까지 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랍계이고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차도르를 쓰면 일행 속에 뒤섞여 갈 수 있을 거라며 이번 여행에 동의해 주었습니다. 우리 팀 중에는 외국인 남성이 없었고 모두 아랍어를 구사할 수 없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을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바그다드 거리에는 수많은 경찰 초소가 있긴 했지만 이른 아침에는 매우 조용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아부 그라이브(Abu Ghraib)에 도착했을 때 뒤바뀌어 버렸습니다. 경찰이 군에 항복하면서 단단한 차단막과 중무기가 등장했고 양편에 T-장벽이 막아 섰으며, 꼼꼼한 수색 작업으로 인해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이러한 초소들이 몇 개나 되는지 셀 수 조차 없었습니다. 아부 그라이브에서 알 카엠까지 삼엄한 경비는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알카엠에 가까워지자 경비 전망대가 초소 주변을 에워싸고 모래주머니로 방어태세를 갖춘 채로 더욱 삼엄하게 수색을 하고 있었습니다. 초소에서 몇 분이 흘렀습니다. 내가 잠이 들었을 때 군인들은 내가 납치되거나 약물을 먹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를 깨우기도 했습니다. 그야말로 확인 작업인 셈이었습니다.
히트(Heet)를 지나니 이륜 마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 도로는 사라지고 울퉁불퉁한 좁은 길이 시작됐습니다. 이곳의 풍경은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솟아 있는 푸른 신록이 우거진 마을, 끝없이 이어진 매우 단조로운 사막, 그리고 모래사막 보다는 좀 더 인상적인 암석이 보이는 사막이 번갈아 가며 펼쳐졌습니다.
모든 게 비어 버린 듯한 휑한 분위기에서 바그다드부터 국경지대까지 450km의 길고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이어졌습니다. 세상의 여느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농민들도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윤기가 나는 다양한 빛깔의 과일과 야채를 하나라도 팔아보기 위해 펼쳐놓고 있었습니다. 이 길을 따라 알 카엠으로 가는 마지막 초소를 지날 무렵, 두 개의 난민촌 중 하나가 우리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진 / 시리아 난민촌의 모습
이라크의 시리아 난민촌으로의 여정 사막의 누르스름한 빛과 줄지어 늘어서 있는 하얀색 텐트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650미터 떨어져 있는 두 번째 난민촌 역시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길가에서 난민촌의 높은 철조망까지는 불과 몇 미터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쉽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난민들은 긴급한 상황일 경우, 그것도 허가를 받아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3,1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이곳 난민촌은 봉쇄된 집단 거주지입니다. 이라크 정부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난민들의 외부 이동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난민들은 그곳을 벗어날 수 없지만 이라크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의 친척은 난민촌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선한 생산품이 든 바구니와 옷 가방을 들고 슬픈 얼굴을 한 채 줄을 지어 난민촌을 향해 가는 이라크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들고 오는 하루치 분량의 선물은 외부 도움에 의지하고 있는 시리아 사람들에게는 생명줄과 같습니다. 이들이 3개월 전 난민촌에 도착했을 당시 이라크 정부로부터 받은 350달러는 이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매일 정부에서 제공하는 따뜻한 세 끼의 식사만이라도 고마운 상황입니다.
난민촌을 에워싼 철조망 안에 자리잡고 있는 관리 사무소에서 이곳 직원 및 지역의회 대표와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난민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과 요구들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을 찾은 시리아 난민 대다수가 그들의 혈통이기 때문에 마을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역의회 대표는 “아이들이 가장 취약한 상태”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이미 날이 추워졌지만 아이들은 겨울 옷은 물론이고 여름 옷도 없는 상황입니다. 지역 주민들이 옷을 나눠주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옷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기금을 충분히 마련한 후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웃을 나눠줄 계획이라고 우리는 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는 질문을 계속 했습니다.
“옷을 나눠줄 아이들의 연령대를 정하셨나요? 대부분 어린 아이들에게만 옷을 나눠주려고 하거든요. 하지만 청소년들 역시 옷이 필요합니다.” 저는 우리가 15세까지 청소년들에게 옷을 나눠줄 계획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 당신들이 무언가를 약속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요. 기금을 모금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고요. 그래도 사람들에게 이곳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지 말해주세요.” 잠시 생각한 후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이들을 먹일 우유가 필요해요. 나는 당신들이 모유 수유를 권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곳의 여성들은 대부분 처음부터 모유 수유를 할 수가 없었어요. 그 아기들이 자라서 이제 생후 8개월, 9개월, 10개월이 되었어요. 아이들에게는 분유와 깨끗한 물이 필요해요. 지역 단체들 중 하나가 제공했었는데 기금이 바닥이 나 지원이 끊긴 상태예요. 당신들이 도와줄 수 있나요?”
저는 일단 필요사항들을 받아 적었습니다. 난민촌 직원이 머리를 내저었습니다.
“이곳에 차를 타고 왔다고요? 우리는 지금까지 유엔 소속 직원들만 보았어요. 아무도 이곳으로 오고 싶어하지 않거든요.” 저는 대화 주제를 전환했습니다. 난민촌 가정들을 만나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온 이상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난민촌 안에서 우리는 겹겹이 둘러싼 두 번째 철조망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난민촌은 깨끗하고 잘 정돈돼 보였고 텐트 사이로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습니다. 텐트 주변으로 물과 위생설비, 목욕설비가 놓여져 있었고 쓰레기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우리 주위로 모여 들었습니다. 모두 앞다투어 말을 하려고 했고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는 모두 미소를 지었고 머물고 있는 천막을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소녀가 미소를 띤 채 원피스 자락을 빙빙 돌리며 만지고 있었습니다. 한 어머니는 세 살짜리 아들을 데려왔습니다. 아기의 팔과 정강이, 다리와 목에 감염의 징후가 보였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계속 이런 상태예요.” 아이의 어머니는 거의 절규하듯 말했습니다.
“아이를 보건소에 데려가고 처방 받은 약도 모두 써봤지만 소용 없었어요”
우리 팀이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유사한 감염 증상을 가진 아이의 사진을 받아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파란색 유니세프 모자를 쓴 위생 관리사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유사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아이와 아기 엄마들로 붐비는 보건소에서 의사는 해결책, 어떤 진단도 내리지 못하고 아기 엄마에게 이전에 처방해 준 약을 먹으라는 말만 하고는 돌려 보내고 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난민촌의 정돈된 모습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어디에도 빨랫줄이나 빨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여성들에게 물어보았을 때, 그들은 갈아 입을 옷이 없어 빨래를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저와 함께 걷던 아이들은 이런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옷은 오랫동안 빨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맨발로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었고 다 낡아 떨어진 샌들은 샤워 할 때도 신었습니다. 모양이 다른 샌들 두 개를 신은 사람도 있었고, 낡아 빠진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긴 팔을 입고 머리를 덮어 쓰고 있었는데도 이미 추위가 느껴졌습니다. 얇은 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는 그들은 내리쬐는 햇볕에도 팔에 닭살이 돋아져 있었습니다. 이곳의 겨울 낮 기온은 0도와 10도 사이이지만 밤에는 0도 아래로 떨어집니다. 좀 전에 만났던 지역 의회 대표의 말이 맞았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겨울을 견딜 수 있는 옷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곳에서 만난 움 마제드(가명)라는 소녀는 저를 천막 안으로 초대했습니다. 텐트 안은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습니다. 이곳의 사람들이 끝까지 자존감을 지키려는 모습을 증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잘게 잘라놓은 토마토와 양파가 가득 쌓인 낮은 탁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미안한 듯 미소를 지으며 이라크에 살고 있는 친척들이 며칠에 한 번씩 무엇인가를 가져다 준다고 말했습니다. 큰 키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15세 딸은 자기 몸을 덮을 만큼 큰 사이즈 가운을 입고 있었습니다. 내전이 시작된 이후 학교에 가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 소녀가 슬픔을 감추기 위해 계속 미소를 짓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홈스(Homs)에서 왔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는 가장 먼저 공격을 받았어요. 많은 친구들이 죽는 모습을 목격했어요. 300명 가량의 사람들이 학교 안팍에서 죽었어요. 지금 저는 이렇게 천막 안에 앉아 있어요. 책도 없고요.”
저는 그 가족과 함께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이곳에서는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방문객을 맞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함께 점심을 먹자고 청했지만 오늘 하루 안에 이번 방문을 마무리 해야 하는 우리는 미안하다고 사과의 인사를 하고 다시 차로 이동했습니다. 13시간을 차로 달려왔지만 알 카엠에서는 단지 몇 시간만 머물 수 있었습니다.
난민촌에서 나온 우리는 접경지대로 출발했습니다. 그곳은 삼엄한 경호를 받는 유엔 호송차량이 난민촌으로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국경지대와 인근 마을을 잠시 둘러본 후 우리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멈춰 서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이번 방문은 위험을 무릅쓰고 기나긴 여정을 함께 견뎌준 동료들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난민촌 사람들의 상황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충격과 슬픔으로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끔찍한 모래폭풍에도 불구하고 운전 기사는 용감하게 17시간을 운전하면서 각 초소마다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시리아 난민 아이들과 그 가족들이 겨울을 날 수 있는 충분한 옷과 약품, 놀 수 있는 안전한 장소와 학교를 보장해 주기 위해 필요한 필수물품을 전달하고 지원할 것을 결심하며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