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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운 세이브더칠드런 95년의 기록
유럽 전역을 무참히 짓밟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올해로 딱 100년이 되었습니다. 전쟁은 전쟁의 당사자뿐 아니라 아이들의 삶마저 무너뜨립니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세계 곳곳의 분쟁지역을 누비고 가뭄과 홍수, 태풍 등 긴급구호 현장에 달려가 고통 받는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미는 이유입니다. 세이브더칠드런 설립의 역사적 배경이 된 1차 세계대전 발발 100년을 맞아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가장 먼저 응답했던 세이브더칠드런의 95년 역사를 뒤돌아보았습니다.
적국의 아이를 돕는 배신자
“영국은 무엇을 지지하는 것인가? 아이들을 굶겨 죽이고 여성들을 고문하고 노인들이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인가?”
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직후인 1919년 4월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43세의 영국 여성 에글렌타인 젭이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는 오스트리아 여자아이의 사진과 영국 정부의 봉쇄정책을 비판하는 내용이 담긴 전단지를 돌리다 경찰에 체포됩니다.
사진/ 세이브더칠드런 창립자 에글렌타인 젭
당시 유럽은 전쟁의 승자와 패자로 극명하게 나뉘었습니다. 영국 등 승전국은 전쟁을 일으킨 동맹국에 가혹한 봉쇄정책을 펼쳤고, 이로 인해 최소한의 물자 지원마저 끊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에는 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특히 어른들이 일으킨 전쟁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아이들의 피해가 극심했습니다.
에글렌타인을 거리로 나서게 한 것도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음으로 모는 전쟁의 잔혹함과 어른들의 비정함이었습니다. 에글렌타인은 영국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결국 법정에 서야했지만 “국적이나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이 법정에서도 호소력을 발휘해 단 5파운드의 벌금만을 선고받는, 사실상 이긴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이끌어 냈습니다.
사진/ 1920년대 러시아 기근 당시 세이브더칠드런의 지원을 받은 아이들. 세이브더칠드런은 공산권과의
대립이 치열하던 당시에도 러시아에 구호기금을 지원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며칠 뒤인 5월 19일, 에글렌타인은 런던 로얄 앨버트 홀에서 “세이브더칠드런펀드”를 공식 출범시킵니다. “적국의 아이들을 위해 돈을 모으려는 배신자”에게 던지려고 썩은 사과를 가지고 몰려든 사람들도 있었지만, 창립 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로부터도 지지와 동의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이날 에글렌타인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한 명의 아이라도 더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 나라 아이이건, 어떤 종교를 가졌건 상관없이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긴급한 인도적위기 국가에서 희망의 증거로
세이브더칠드런이 한국에 첫 발을 내디딘 것도 한국전쟁의 포화로 폐허가 된 1953년의 일이었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 미국 한국지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부산 인구 약 100만 명 중 절반 이상이 남편을 잃은 여성과 집을 잃은 아이들이었을 정도로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인도적위기 지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 영국∙미국∙캐나다∙스웨덴은 피난민이 몰린 부산에 시급히 사무소를 꾸리고 의료지원과 식량 배급, 생필품 보급 등 전쟁고아와 난민을 위한 긴급구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듬해부터는 결연후원 사업을 시작해 20여 년 간 1만 명이 넘는 한국의 아이들이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해 후원자와 결연을 맺었고 이중 많은 사람들이 교사와 농부, 의사, 간호사 등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진/ 1970년대 세이브더칠드런 미국을 통해 후원을 받은 한국의 결연 아동들
한국 전쟁 후 부산 아이들의 삶과 세이브더칠드런의 구호 활동은 1959년 영국 비비씨(BBC) 방송을 통해 “어 파 크라이(A Far Cry)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고아원 흙바닥에 앉아 구호품인 우유를 마시는 아이들, 할머니와 어린 누이의 등에 업혀 보건소를 찾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이 40분짜리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이곳에 희망이 있으며 희망은 내일을 기대하게 만든다.”는 말을 세계에 전합니다. 그리고 이제 한국은 이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각국의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벗어나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이 바로 희망의 증거가 된 셈입니다.
파괴된 삶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이처럼 분쟁지역 아이들에 대한 인도적지원에서 출발한 세이브더칠드런의 역사는 1920년대 러시아 기근, 30년대와 40년대 스페인 내전과 2차 세계대전, 80년대 에티오피아 기근, 20세기 최악의 학살로 불리는 르완다 내전, 2000년대 인도네시아 쓰나미와 아이티 대지진 그리고 최근의 시리아 내전과 필리핀 태풍까지 국경과 인종,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95년간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 전 세계 30개 회원국과 함께 하고 있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2013년 한 해에만도 세계적으로 119건의 자연재해, 분쟁 등 인도적위기에 대응해 활동을 펼쳤고 이를 통해 48개 국가에서 765만 명을 지원했습니다.
사진/ 2010년 식량위기를 겪고 있는 니제르 아귀 지역 진료소에서 영양실조 아동을 진료하고 있는 모습
세이브더칠드런은 앞으로도 단 하나의 목적 “단 한 명의 아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인도적위기의 한 가운데에서 아이들과 더 가까이, 아이들의 목소리에 더욱 귀 기울이는 활동을 이어 나가겠습니다. 전쟁과 자연재해로 고통 받고 있는 아이들이 파괴된 삶을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후원자 여러분도 함께 해주십시오.
글: 박영의 (커뮤니케이션부) / 사진: 세이브더칠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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