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넘치는 위탁 가정, 상수네 이야기 | 페이스북 트위터 퍼가기 인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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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7-03-15 조회수 6771 |
사랑이 넘치는 위탁가정, 상수네 이야기 - 충북가정위탁지원센터 위탁가정 인터뷰 합창단, 피아니스트, 때로는 바이올리니스트로 무대에 오르는 것을 즐기는 '무대체질' 상수. 위탁 어머니 신명자 씨는 상수를 음악적 소질이 다분한 아이로 키웠습니다. 자주, 많이 들려주고, 어떤 것이든 호기심을 보이면 해볼 수 있도록 한 덕분이랍니다. 가정 위탁은 친부모의 사정(이혼, 가출, 학대, 경제적 이유 등)으로 친가정에서 자랄 수 없는 아동에게 다른 가정을 제공하여, 아동을 친가정과 유사한 환경에서 보호하는 아동보호정책입니다. 2월 24일, 충북가정위탁지원센터에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왔습니다. 연주곡은 '즐거운 나의 집'. 이날은 세이브더칠드런이 충북가정위탁지원센터 운영을 맡게 돼 새롭게 문을 여는 날이었습니다. 올해 중학교에 진학하는 상수. 위탁가정 대표로 위탁 어머니와 함께 축하공연을 했습니다. 바이올린 합주에 이어 카드 마술도 선보여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상수: (바이올린) 이번 주 월요일부터 연습했어요. 오늘 아침에도 연습하고 왔어요. 마술은 유튜브보고 혼자 배웠어요. BJ가 해법도 알려줘요. 어머니: 상수가 바이올린 배운 지는 1년 됐어요. 엄마랑 같이하자 해서 저는 작년 여름부터 배웠고요. 복지로(보건복지부 운영 복지포털 사이트)에 아동정서발달 프로그램이 올라와요. 그런 기회를 많이 활용해서 문화 쪽으로 다양한 경험을 시켜줬어요. (상수가) 더 어렸을 때 피아노도 배웠어요. 무대에 서길 좋아하는 상수. 무대경험이 많다고 하는데요. 상수: 저학년 때 합창단에서 소프라노를 3년 정도 했었어요. 어머니: 제일 큰 자리가 위탁가정의 날 행사인데 2-300명 선플라자 꽉 차는 자리 앞에서도 잘해요. 안 한단 소리 안하고. 세 살 때 혼자 (무대) 나가서 의상 입고 춤도 췄으니까요.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애기 때부터 혼자 곧잘 했으니까. 학교에서 발표도 적극적으로 잘해요. 상수: 제가 음악 쪽에 흥미가 많아요. 음악적 소질이 있는 상수. 위탁 어머니가 상수의 청각이 발달하도록 각별히 신경 썼던 영향이 컸습니다. 어머니: (청각이 발달하도록) 아기 때부터 노래 많이 불러주고, 책 많이 읽어주고 귀로 많이 들려주다 보니까 국어도 잘하고 음악도 잘해요. 상수: 제 친아빠가 듣지 못하시거든요. 양엄마가 처음 저를 만났을 때, 제 귀에 “상수야” 하고 불렀는데 제 이름을 듣고 딱 양엄마를 찾아 봤대요. ‘아, 귀는 들을 수 있겠구나’하고 엄마가 그때부터 가나다라 시켰대요. 요즘 공부할 때도 주로 음악 틀고 해요. 엄마가 그러는데 제가 귀가 밝다고 하시더라고요. 상수는 청각장애를 가진 친부모 사이에서 임신 8개월 만에 태어났습니다. 친아버지는 노점상을 했지만 생계가 어려워져 이혼하게 됐습니다. 상수를 홀로 양육하기 버거웠던 친아버지는 가정위탁보호를 신청하게 됩니다. 가정위탁 당시, 상수는 친부모에게 언어자극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 얘가 2004년 12월에 태어나서 2005년 12월부터 얼굴 '찜'하고 정식으로 위탁아동된건 2006년 2월부터. 만으로 11년 차네. 12년 됐네요. 상수: 제가 어렸을 때 엄마를 졸졸 따라 다녔대요. 어머니: 제가 어린이집을 하는데, 상수네 친가족이 해체되는 와중에 상수 친아빠를 알게됐어요. 당장 봐줄 사람이 없어서 봐주다가 가정위탁센터에서 ‘위탁가정 나타날 때까지만 봐주세요.’ 하던 게 길어졌어요. 그럼 제가 하죠, 했어요. 처음 집에 와서 삼일 정도를 요만큼도 안 떨어지고 제가 누우면 눕고 일어나면 일어나고 그랬어요. 저는 애 보는데 선수잖아요. (상수가) 아주 어릴 때라 밀착이 잘 됐죠. 친아빠, 위탁엄마얘기를 자연스럽게 하는 상수. 위탁 어머니는 상수가 어릴 때부터 가정위탁지원센터 활동에 꾸준히 참여했습니다. 자연스레 위탁 사실을 알게 되고 친아버지와도 정기적으로 만나며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머니: 센터에서 부모 보수교육 관리해주고, 가정방문도 하고, 부모랑 함께 나들이 프로그램 많이 해줬어요. 현장학습프로그램에서는 비누, 액자, 치즈, 케익도 만들고요. 추억거리도 생기고 바람도 쐬니까 아이도 좋아하죠. 웬만하면 안 빠지고 참석하려고 해요. 일년에 한 번씩 위탁가정의 날에 친가정 나들이를 하는데 상수가 아기일 때부터 안고 갔었어요. (상수에게 위탁 사실을)오픈해서 키웠어요. 아이가 말할 때부터 우리는 ‘키워주는 엄마, 아빠다’ 하고 일러줬죠. (친아빠)연락 취해서 만나게 해주고. 그러나 위탁부모로서 상수를 키우면서 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아이를 케어하는 입장에서 법정대리인 역할을 못하니까 불편해요. 다행히 친아빠가 협조를 잘해서 다행이지만. 3-4년은 친아빠가 돈 벌러 가느라 공백기도 있었어요. (가정위탁의 날) 행사를 못하고 넘어가야 하니까 그런 점이 어려웠어요. 그때 여기저기 연락해서 고모 두 명, 큰엄마까지 세 사람을 알게 됐어요. 가계도도 만들어주고요. 자타공인 아이 키우기 선수인 위탁 어머니. 상수를 어떻게 키웠을까요? 어머니: 순수하게 키우려고 텔레비전도 없앴어요. (그래서 인기)개그맨도 모르죠. 텔레비전도 어디 가서 동냥으로 보는 거죠. 도서관 자주 가게 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책 읽게 했어요. 말을 잘하는 아이로 키우려고 했어요. 요즘 버스 타고 다니는데 내년에 중학교 가니까 버스 타는 것, 버스카드 충전하는 것도 알려줬어요. 홀로 서게 하고 자기 앞가림 하게 키운 거죠. 요새는 중학교 가니까 공부에 좋은 습관 들이느라고 (상수가) 좀 힘들어하는 거 같아요. 아직까지는 잘 따라와요. 사춘기가 오더라도 툴툴거리면서도 가족으로써 해야할 몫 하면서 따르겠죠. 성품은 착해요. 하고 싶은 거 하게끔 했으니까 고집 없게 키우지는 않았고. 적극적이고 밝게 키웠어요. 위탁 어머니는 위탁부모가 되기 전에 두 아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상수와 한 가족이 되었을 당시, 형들은 어떻게 이를 받아들였을 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머니: 큰아들 군 입대하고 둘째가 고3일 때였죠. 큰 애가 군대 갔을때 면회가서 ‘네 동생이야’ 하고 상수를 데려갔어요. 처음엔 다 큰 애들인데도 ‘우리는 상수에게 밀렸어, 우리 키울 때 엄마가 아니야’ 라면서 시샘을 하더라고요. 그러다가 큰 애가 “엄마, 우리가 못하는 걸 상수가 해주는 것 같아. 상수 잘 키우고 있어.”했어요. 지금은 둘다 직장 다니고 있어요. 요즘 둘째가 상수에게 기본생활, 예의범절 같은 걸 짚어줘요. 상수가 커서 자립할 수 있도록. 남편은 상수가 하고 싶은 대로 맘껏 하게 하는 주의고요. 위탁 어머니는 상수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 지 속속들이 꿰고 있습니다. 상수: 양엄마가 10년 넘게 제 곁에 있었으니까 제가 뭘 좋아하는지 알죠. 김치나 김치찌개, 된장찌개 좋아해요. 제가 계란말이도 좋아하니까 자주 해주세요. 비빔밥도 좋아해요. 고추장도 계란 후라이해서 비벼먹고. 어머니: (상수가) 클래식도 좋아해요, 보러 잘 가고. 그래서 ‘내가 세상에서 행복한 아이야. 나는 문화를 얼마나 누리고 사는 지 몰라’하고 곧잘 말한답니다. ‘이게 아빠 엄마 덕이죠.’ 이런 얘기도 하고요. 위탁 어머니는 가정 위탁을 고민 중인 분들에게 '강력 추천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머니: 요즘 아이도 적게 낳고 하니까 가족 수도 적잖아요. 위탁아동과 살면서 가족 수도 늘고 에너지 넘치는 아이를 키우면서 저도 젊게 사는 것 같아요. 아이 키우는 보람도 느끼고요. 그래서 추천해요.
중앙가정위탁지원센터가 발표한 통계(2015 요보호아동 현황)에 따르면, 보호가 필요한 아동이 2015년 한 해만 5천 여명에 이릅니다. 하지만 2700명 가량은 시설로 보내지고, 1600명 정도만이 가정위탁제도 안에서 보호받고 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위탁가정에서 자신감있고 밝은 아이로 자란 상수. 보호위기에 놓인 아이들이 따뜻한 위탁가정의 품에서 상수처럼 건강하고 밝게 자라기를 바랍니다. 글, 사진 김하윤(커뮤니케이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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