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나의 뿌리를 찾은 기분…, 45년의 후원은 내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한 창’”
-해외결연아동에서 세계적인 에이즈 연구자로, 조명환 교수 이야기
45년간 매달 15달러 해외결연후원을 해준 세상에 하나뿐인 후원자,
연구자에서 세계적인 보건전문가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을 바꾼 사람들, 사건들
얼마 전, 세이브더칠드런에 특이한 문의가 있었습니다.
'1950년대 아동구호연맹에서 해외결연후원을 받았는데, 당시의 아동구호연맹이 현재의 세이브더칠드런인지 확인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서는 ‘KC 3868’라는 후원아동등록번호와 영어 메모가 적힌 몇 장의 오래된 흑백사진. 그런데 세이브더칠드런 US의 화재로 인해, 당시 기록이 모두 유실되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고자 만난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1956년에 태어난 한 소년,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 태어난 한 아이가 지금은 초로의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환한 봄날, 건국대 연구실에서 만난 조명환 교수(생명과학특성학과)는 죽을 때까지 45년간 매달 15달러 해외결연 후원을 이어간 ‘나의 후원자’, 에드나 넬슨 어머니를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1956년에 해외결연이 시작됐는데 원래 최초 후원자는 헬렌 넬슨, 그러나 후원 시작 3년이 지나 사망하면서 유언으로 언니 에드나 넬슨에게 소년의 후원을 지속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에드나 넬슨, 한 소년이 자라나 성장하고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45년간 매달 꼬박꼬박 15달러를 보내온 놀라운 사람. 동생의 유언을 이어받은 그는 세이브더칠드런 해외결연후원자가 되었습니다. 평생 교사로 일했으며, 퇴직 후엔 편의점 직원으로 일하며 작은 마을에서 살았고, 104살로 죽는 날까지 한평생 생면부지의 한 아시아 소년을 격려했습니다.
소년은 대학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나 힘들게 공부해 미생물학․면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대학교수로 연구를 지속하다가 현재 아시아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으로 에이즈 퇴치에 앞장서며 세계적인 보건정책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 부산에서 열린 10차 아시아태평양에이즈대회 장면. 회장 조명환 교수가 연설중입니다.
반갑습니다. 어린 시절 ‘아동구호연맹’에서 결연후원을 받았는데, 최근에 그 기관이 어디인지 수소문해 결국 세이브더칠드런임을 확인했다는 사연, 들었습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왜 지금 찾으려고 하셨나요?
사실 저는 평생 후원받은 일을 말한 적 없어요. 가난해서 원조받았다, 말하는 게 자랑은 아니고. 그러다 재작년 어떤 단체에 강사로 초청받아 3천명 앞에서 처음 말을 했지요.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결심했어요. ‘나는 45년간 후원을 받았다. 이제 에드나(후원자 이름) 어머니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사실 옛날엔 후원이나 원조가 흔했고, 고마웠지만 평생 깊이 감사하며 살지는 않았어요. 45년간 후원한다는 게 대단한 일이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사실 매달 15달러, 당시로선 큰돈입니다. 그걸 45년 하신 거죠. 나중에 제 주변에도 물어보니 1~2년 해외결연 하다가 많이 중단한대요. 그분들이 제가 45년간 후원받았다고 하니 정말 감동하더군요. 어떤 분은 막 울어요. 후원하던 아이한테 미안하다고.(웃음)
그러면서 제가 작년에 <꼴찌박사>라는 책을 내게 됐어요. 원고 쓰는데 어렸을 때 어머니 손을 잡고 따라간 ‘아동구호연맹’이 대체 어느 기관인지 자꾸 궁금한 겁니다. 아동, 구호 단어가 들어간 곳부터 찾았죠. 확신은 못했는데 라디오방송에 나가서도 이야기했고요. 제가 먼저 세이브더칠드런(아동구호라는 뜻)에 연락했어요. 저한텐 지금도 제 후원아동번호와 영어 메모가 적힌 흑백사진이 있거든요. ‘KC 3868’, 1963년 사진인데, 뒷면엔 ‘To Myong from Edna Nelsen’, 연필로 쓴 메모가 있고요. 그러자 세이브더칠드런에서 확인해줬어요. ‘KC’로 시작되는 일련번호, 그거 우리가 쓰던 방식이 맞다.’고요. 정말 뿌리를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 지금도 간직한 후원아동번호가 적힌 오래된 흑백사진. ‘KC 3868’, 1963년 사진. 뒷면엔
‘To Myong from Edna Nelsen’이라는 메모. 세이브더칠드런의 일련번호 양식입니다.
45년의 후원, 무척 드문 경우입니다.(보통 만 18세까지만 결연후원이 가능) 후원자는 대체 어떤 분이셨나요?
사실 그게 기적 같은 사랑이었다는 건 이제야 알았어요.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란 걸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사실 후원자 정보는 미국인이라는 것과 이름만 알았는데 크면서 궁금했어요. 미국, 어디에 사시지? 청년이 되자 직접 연락하고 싶었죠. 영어로 편지 쓰면 주소 알려주마, 하셔서 나중엔 직접 편지를 주고받게 됐어요.
보통 후원아동이 성인이 되면 그만두는데, 그분은 제가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매달 편지에 15달러를 동봉해 꼬박꼬박 보내주셨어요. 바빠서 은행에서 수표 안 찾아가면 편지로 ‘왜 안 쓰냐’고 재촉하셨죠.(웃음) 어디에 쓰는지도 궁금해 하셨어요.
해외결연은 ‘한 아이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후원’이라고 말합니다. 해외결연후원에 대해 후원아동이었던 교수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가난해서 후원받는다는 게, 기분 좋지는 않죠. 하지만 큰 축복이기도 했어요. 다른 나라, 다른 세계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됐고, 비록 가난했지만 어려서부터 편지를 통해 영어를 보면서 성장했어요. 부잣집 애들보다 먼저 제가 ‘큰 나라, 다른 나라’를 생각하기 시작한 거예요. 저 바깥에 커다란 세상이 있구나, 결국 나중에 미국에 유학가고 교수가 되고, 국제무대를 뛰어다니며 일하는 데 큰 영향을 줬죠.
새로운 나라를 생각한다는 건 새로운 언어, 문화, 사고가 들어온다는 거예요. 단순한 감사,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새로운 꿈을 꾸게 되고, 그게 결국은 나의 꿈으로 연결돼요.
삶에 커다란 변화가 생기는 겁니다. 그건 후원금, 돈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일이죠. 후원자들이 보통 ‘적은 돈이다’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물질적 후원 외에도 아이에게 많은 의미와 영향을 줘요.
에드나 어머니도 제겐 그런 존재였어요. 계속 저한테 물어보셨죠. ‘커서 뭐가 될래?’ ‘소방관이요.’ 그러면 또 답장이 옵니다. ‘너는 세계 최고의 소방관이 될 거야.’ 제 꿈을 많이 물어봐주셨어요. 아이들은 자꾸 꿈이 바뀌잖아요. 나중에 또 ‘야구선수가 될래요’, 하면 ‘너는 세계 최고의 야구선수가 될 거야’, 늘 ‘너는 세계 최고가 될 거야’라고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늘 꿈이 바뀌어도 아무 말 안 하셨으니, 저는 늘 새로운 꿈을 가질 수 있었죠. 나중에도 힘이 됐습니다.
정말 놀라운 분이에요. 45년간 수백 통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들었는데, 기억나는 편지나 인상적이었던 일은?
편지로 제 꿈이나 많은 걸 물으셨어요. 나중에 물어보니 ‘어려운 환경이었으니 꿈을 심어주고 싶었다. 다 잘될 거란 말을 해주고 싶었다.’고 말씀하셨어요. 또 45년간 변함없이 보내주셨던 두 문장이 있어요.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신다.… 너를 위해 기도하마.’ 주고받은 편지도 540통이 넘어요.
나중에 저는 하버드대학 케네디스쿨에서도 공부했고, 또 스탠포드대학에서 교환교수로 노벨상 수상자 바루크 블럼버그(Baruch Blumberg) 박사와 일하면서 세계적인 과학자나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기업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요. 부를 이룬 후 기부하는 훌륭한 사람들도 많아요. 그러나 에드나 어머니는 부자가 아닌데도 더 가난하고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론 더 대단한 사람이지 않나, 저는 생각해요.
[안내] 아동의 개인정보와 신변 보호, 아동간 상대적인 박탈감 예방 등을 위한 노력으로, 현재는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한 아동과의 서신교환이나 만남 이외의 개인적인 교류는 허용되고 있지 않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후원자를 직접 만나러 가셨다고 들었는데, 45년간 편지로만 알던 분을 실제로 만났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미국 유학가서 제가 먼저 세 차례 찾아가겠다 했죠. 그런데 늘 절대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섭섭했죠. 저라면 오래 도왔던 아이가 유학 와서 찾아온다면 은근히 자랑스럽고 보상심리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 분은 그냥 순수한 후원을 하고 싶으셨던 거예요. 결국 미국 유학생활 10년간 한 번도 못 봤어요.
귀국해서 제가 교수가 되고, 이 분이 만 98세가 됐을 때(대학교수 된 후에도 후원이 이어졌습니다), 안 되겠다, 살아계실 때 봐야 한다, 생각하고 연락 없이 네브라스카 주로 찾아갔어요. 아주 작은 시골이었어요. 놀랐어요. 잘사는 미국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25년간 초등교사로 지내시다가 마지막엔 편의점 직원으로 일한 평범한 분이셨어요. 비행기 한 번 안 타본 그런 검소한 미국인이요. 여권이 없는 미국인을 처음 봤어요.
동네 가게에 들어가 이런 분 있나, 사진 보여주고 물어서 찾아갔죠. 동생과 살고 계셨어요. 1층에서 기다리는데 2시간 가까이 안 나타나셨어요. 별 생각이 다 들었죠. 너무 실례를 범했나, 싫은데 찾아왔구나, 후회도 하고.
그런데 2시간이 지나자 2층에 빛나는 후광 때문에 제겐 정말 천사처럼 보이는 모습이 나타났어요. 목욕도 하고 이쁜 귀걸이, 목걸이도 하고 빨간 구두도 신고, 저를 만나기 위해 단정하게 차려 입으셨던 거예요. 98세라 몸이 불편해서 그렇게 오래 걸린 거였어요.
제겐 그 모습이 세상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걸려서 계단을 내려오셨죠. 제 나이 40살이 되었을 때입니다. 거기서 1주일간 지냈어요.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 마침내 에드나 어머니(당시 98세)를 만났습니다.
▲ 45년간 주고받은 540통이 넘는 편지. 평생 잊을 수 없는 15달러가 동봉된 편지였습니다.
어엿한 성인이 된 교수님을 보고 무척 기뻐하셨겠어요. 가장 궁금한 건 뭐였나요?
사실 한 가지 질문이죠. 그게 궁금해서 비행기 타고 멀리까지 찾아갔으니까요. “어떻게 이렇게 오래 저한테 사랑을 베풀 수 있었나요?”라는 질문. 첫날 물어봤죠.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다. 서로 작은 사랑을 내놓으면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니?”
저도 지금 에이즈 아이들 돕는 일을 하다 보니, 그 말의 의미가 그저 사랑의 행위를 변함없이 보여주란 말이구나, 생각해요.
대학공부나 유학생활 때 가장 힘이 된 건 무엇이었나요? 파란만장한 학창시절이었다고요.(웃음)
어릴 때부터 공부를 못해서 제 별명이 ‘형광등’이었어요. 늘 책상 앞엔 누구보다 오래 앉아 있었지만 이해력이 떨어졌죠. 평생 남 앞에서 내세울 이야기가 없는 아이, 공부도 못하고, 가난하고, 늘 듣기만 했던 아이였어요.
고3 때 대학 갈 성적도 안 됐는데, 마침 아버지 지인인 건국대 교수님이 집에 오셨어요. “대학 갈 때 안 됐나?” “갈 수 있는 데가 없습니다.” 했죠. 사실 문과여서 상대나 법대 가서 취업하고 싶었어요. “꿈이 뭐니?” 물으시더군요. 그때 꿈도 없었는데 그분 앞에서 “꿈이 없어요.” 할 수도 없고, 뭐 맨날 꿈 이야기 바뀌어도 에드나 어머니도 뭐라 안 했으니 이렇게 말해도 회개할 건 아니겠다, 해서 “교수 되고 싶습니다!” 했죠.(웃음) 그랬더니 미생물공학과가 가끔 미달이니 넣어보라는 겁니다. 그땐 생명공학이란 단어가 아예 없던 때였어요.
그럼 그렇지, “저 문과예요!” 했죠.(웃음)
어쨌든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지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두 달간 미적분 공부를 해서 간신히 들어갔어요. 가서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1학년 때 물리학, 화학, 수학 다 D, D, D…, 사실 익숙한 점수였죠. 그전에도 ‘미’가 두어 개 나오면 온 가족이 기뻐했거든요.(모두 웃음)
어쨌든 졸업할 때는 A- 받았고, 오하이오주립대로 유학갔죠. 그런데 영어나 성적이 안 돼 유급에 학사경고 받고 공원에서 하루 종일 울고불고 헤매며 몇 달 지냈어요. 창피해서 아무한테도 말 못하고, 에드나 어머니에게만 말했죠. 한국에도 못 가고, 받아주는 다른 대학도 없고 정말 나락이었어요. 그때 끝까지 신뢰하고 편지 주고 기도해주신 그분 때문에 다시 힘을 얻었어요.
그러는 중 기적처럼 미국에서 딱 한 사람, 애리조나대의 찰스 스털링 박사가 저를 받아줬어요. 이분이 당시로선 초기였던 에이즈 전문가였죠. 문과생이었던 제가 공대로 진학했고, 원래는 미국에 유전공학 공부하러 왔다가 에이즈가 뭔지도 몰랐던 그 시절, 미답의 땅이었던 에이즈 연구를 하게 된 거예요.
▲ 에이즈가 뭔지도 몰랐던 그 시절, 미답의 땅이었던 에이즈 연구를 하게 됐습니다.
놀라운 인생역정입니다. 이외에도 본인의 인생이나 연구에서 큰 영향을 미친 사건, 사람이나 책, 만남이 있다면?
『성경』은 인생, 영감, 용기, 역사, 수많은 게 있으니 자주 펼쳐봅니다.
또 바루크 블럼버그 박사를 꼽고 싶어요.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간염바이러스 최초 발견, 백신개발자입니다.(웃음) 제가 건국대 개교 50주년 기념강연 청탁을 하러 미국까지 찾아가서 하루를 꼬박 복도 의자에서 기다리는 무모한 투혼 끝에 결국 블럼버그 박사가 옥스퍼드대 강연 일정을 조정해 한국 강연을 하게 된 인연이 있어요.
그런데 6개월 뒤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스탠포드대로 가게 됐는데 같이 가자고. 거기서 연구생활 1년 했지요.
그런데 세계적인 에이즈 대가인 메리건 교수와 연구하는 한편, 저녁이나 티타임에 블럼버그 박사가 저를 자꾸 불러요. 그러면서 유명한 학자들, 노벨상 수상자들, 실리콘밸리 경영자들, 정재계 인사, 심지어 NASA 우주인까지 다 만나게 된 겁니다. 처음엔 이해가 안 갔어요. 물어봤죠. “왜 바이러스 전문가가 바이러스는 안 가르쳐주고 사람 만날 때 나를 부르나?”
그런데 5개월쯤 지나자 알았어요. 미생물학, 면역학, 에이즈 연구만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제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동안 저는 이런 쪽 사람들만 만났는데 이 분을 통해 과학, 정치, 경제, 경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한 거예요.
같이 대화하면서 같은 이슈를 놓고도 견해, 관점이 다양하다는 걸 깨달았죠. 제 뇌가, 제 머리가 변하고 있었어요.
아, 교수님 경력에서 행정대학원(케네디스쿨)이나 메릴랜드대 정치학 겸임교수, 이런 이력이 갑자기 등장한 게 신기했어요.
맞아요. 엄청난 변화죠. 생각해보세요. 전형적 문과형 뇌 고등학생에서 자연과학 뇌 대학생으로, 이젠 사회과학과 인문학 뇌로 변하기 시작한 거예요. 바로 ‘통섭’의 뇌죠.
실은 블럼버그 박사가 제가 복도에서 하룻밤 기다리던 모습 보고 ‘이 사람은 실험실에서 끝날 사람은 아니겠다, 세계를 뛰어다닐 사람 같다.’고 생각했대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요.
저는 블럼버그 박사와의 만남으로 완전히 사람이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가서 행정학 공부를 하게 됐죠. 평범한 생물학 교수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됐어요. 49살 때 교수직을 잠시 내려놓고 생물학 교수가 엉뚱하게 행정학, 정치학, 경제학, 리더십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그때 주변서 다들 왜 이러냐, 미쳤냐, 말리고 난리였죠.(웃음) 그 후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이 된 겁니다.
▲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졸업식. 생물학 교수였던 그는 49살 때 교수직은 잠시 내려놓고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아시아 태평양 에이즈학회 회장이 되어 에이즈 퇴치운동도 시작하게 됩니다.
그때 어떤 세상을 만난 건가요?
사실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다가 현장에서 에이즈 환자들, 가족을 만나면서 고통과 가난도 만나게 됐어요. 저는 이제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거죠. 그때부터 에이즈 퇴치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생각했죠.
이제 에이즈는 질병 이슈가 아니라, 정치경제적 이슈, 즉 빈곤, 불평등의 문제예요. 에이즈 치료비가 연간 2~4천만 원인데 아프리카에만 2,200만 환자가 있어요. 하지만 치료약이 있어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죠.
아프리카인들에게 약이 전달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는 치료비 모금 그리고 정책과 예산집행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에이즈학회장 돼서도 기업인, 정치인, 유엔기구 리더들을 만나 설득하고 후원금을 유치하고 예산, 정책 논의를 하는 거죠.
즉, 제 길이 에이즈 연구자에서 보건정책, 사회활동가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UNAIDS(각 국가의 에이즈 관리․예방사업을 돕기 위해 1996년 창설된 유엔 산하 에이즈전담기구), 빌게이츠재단, 빌클린턴재단과 일하고, 국제회의에도 가고, 국제질병퇴치기금과도 일해요.
그러면서 제가 일하는 국제의약품구매기구에서 ‘고통없는 후원(Painless Contribution)’, 즉 세계경제 상황에 상관없이 ‘생활이 자연스레 기부로’ 연결되는 후원방식도 고안했어요. 예를 들어, 항공료에서 1천원이 자동기부 되면 누구나 후원할 수 있죠.
이렇게 해서 한국을 포함해 8개국에서 5년간 2조 2천억을 모아 아프리카에서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등으로 고통받는 아이들 1백만 명을 치료하고 있어요.
만약 커피 한 잔마다 1원, 자동차 한 대 살 때 1만원, 이렇게 그냥 생활하면서 기부가 되면, 이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언제 가장 행복하십니까?
사실 이런 질문은 처음인데, 한참 생각해봤죠.(웃음) 그런데 행복한 순간이 금방 생각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 인생에 그런 순간이 없었나? 스스로 물어봤어요. 기쁜 순간은 많았어요. 유학갔을 때, 박사학위 받았을 때, 교수 됐을 때…, 그런데 그건 행복이라기보다는 기쁨이었죠. 그 기쁨은 큰일이나 새로 목표가 생기면 증발되어 버려요. 교수가 되고 행복했나? 그런데 그 당시의 기쁨은 지금 없어요.
그럼 언제 행복한 걸까? 사실 제가 아시아 에이즈학회장으로 일하다가 태국 적십자에서 에이즈 남성을 상담한 것이 에이즈 퇴치운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계기가 되었어요. 그의 아내가 감염되었고, 엄마(임산부)에게서 수직감염 된 아이가 태어났고, 결국 온 가족이 다 HIV바이러스 양성이라는 걸 확인시켜주게 됐죠. 재앙만 확인시켜 주고 가버리는 그런 기분이었어요. 차마 그대로 떠날 수 없어서 아기 치료비를 제가 냈어요. 아기들은 50만원 비용으로 2~3년 치료하면 완치돼요. 그때 제가 치료해준 아이가 살아서 이제 12살 됐어요. 제가 그래서 그애를 ‘조이(Joy)’라고 불러요.
지금 그애를 보면 전 행복해요. 교수 됐을 때의 기쁨은 지금 생각도 안 나요. 그러나 불과 50만원으로 생명을 살렸고, 지금도 그 아이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걸 보면서 ‘내가 사람을 살렸구나, 생명을 구했구나.’ 정말 행복감을 느껴요. 그건 큰 행복입니다.
조이가 나중에 커서 좋은 일을 하는 인재로 성장한다면 행복감은 더욱 크겠죠. 지금도 제가 도와주는 아이들인데, 길거리에 버려졌던 아프리카 에이즈 고아들이 잘 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세이브더칠드런은 모자보건사업의 일종으로 에이즈 예방교육을 펼칩니다. 에이즈 전문가로서 NGO 보건정책 방향에 대해 짧게 조언해주신다면?
우선 아이들, 즉 산모-영유아 감염이 문제인데, 이렇게 HIV/AIDS 예방교육, 인식개선 프로그램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어요. 무엇보다 에이즈가 퇴치되려면 정부, 기업인, 정치인 등이 나서야 합니다. 2030년까지 에이즈 퇴치를 위해 국제기구나 NGO 등과 함께 노력할 겁니다.
▲ 방글라데시 아이들과 함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빈곤, 불평등 속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혼자 있을 땐 주로 뭘 하시나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마시며 생각하거나, CNN, BBC 등 외신방송을 즐겨 들어요.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떤 문제를 어떤 나라가, 리더가 어떻게 해결하는지 항상 궁금하거든요. 에드나 어머니를 통해 ‘세계’가 제게 들어온 거잖아요.
이제 세계가 이웃이 된 삶을 살고요. 세계정세가,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항상 관심 있게 봅니다. 참, 저는 메릴랜드대학 정치학 겸임교수로 미국정부학을 강의하고 있어요.(웃음)
가장 힘들 때 어떻게 힘을 내셨습니까?
복잡해서 해결하기 힘든 일, 인간관계나 사회적 환경에서 어려움이 생기면 항상 기본으로 돌아가자, 생각합니다. 학교나 집을 벗어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고, 숲이나 강가를 걷는다든지, 자연 속에서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다 보면 아이디어도 많이 떠오릅니다.
다시 선택한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가요?
연구도 좋지만, 세계를 다니며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어요.(웃음) 나와 다른 장소와 문화에서 다른 언어를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궁금해요. 그들을 보고 싶고 그들이 사는 환경을 보고 싶어요.
어려움 속에서도 과학자, 벤처기업인 그리고 사회운동가로서의 길을 꾸준히 걸어오셨는데요.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친구들에게 한마디 조언, 부탁드립니다.
이 시대 청년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청년기는 어느 시대나 다 어려운 것 같아요. 직업, 미래 다 불확실하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고요. 결국 누구나 자기 인생을 개척하는 시기를 거쳐야 하잖아요. 그래도 변함없는 건 본인의 마음, 열심인 마음, 정신이 필요하다고 봐요.
저는 ‘거북이도 토끼를 이긴다’란 이야기를 좋아해요. 다리 짧고 등엔 무거운 걸 얹은 거북이, 그리고 능력 있는 토끼. 거북이는 계속 천천히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요, 힘들어도 포기 않고. 그러면 기회가 어느 순간 온다고 봐요. 힘들지만 포기하면 거기가 끝이에요. 힘들어도 소망을 가지면 나아가요.
에드나 어머니가 계속 제게 꿈을 물었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요. 어떤 꿈이라도 칭찬해줬어요. 그래, 넌 가난해. 하지만 이게 너의 끝은 아니야. 꿈을 가지고 계속 걸어가라…. 그런 마음이었던 거예요. 제가 교수가 된 후에도 15달러씩 매달 보내온 이유는, 교수 돼도 그걸로 끝이어선 안 된다, 너도 나처럼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며 걸어가라, 그런 의미였을 거예요. 여기서 안주하지 말아라, 이제는 더 큰 세상, 더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5만 해외결연후원자를 포함해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조금 더 하신다면?
아까 에이즈 치료를 해준 아이 이야기를 했죠. 내 꿈을 이룰 때보다 남을 도울 때 행복하구나, 그걸 깨달았어요. ‘그럼 에드나 어머니가 45년간 날 도운 것도 그거였겠다, 날 보며 행복했겠구나.’ 생각했어요. 그분은 행복한 마음으로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 유학, 박사, 교수의 길을 걸어가는 저를 바라보셨을 거예요.
저도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어요. 에드나 어머니의 45년 선행은 제가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아마 세상에 나오지 않았겠죠.
“사랑의 행위는 첫째는 사람의 행위로부터 나온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돼요. 15달러를 매달 보내주던 그 마음이 제가 지금 하는 일의 밑거름이 됐어요.
저 역시 연구나 논문 하나 더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귀중한가, 깨달았습니다. 저는 제 ‘뿌리’를 알고 싶었고, 세이브더칠드런이란 걸 알고 기뻤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 역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인지 알았으면 합니다. 적은 액수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한 사람의 미래를, 삶을 바꾸는 일이니까요.
제 이야기가 세이브더칠드런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요. 그런 마음으로 신뢰를 보냅니다.
▲ 건국대 생명특성학과 연구실에서 만난 조명환 교수. “저는 제 ‘뿌리’를 알고 싶었고, 세이브더칠드런이란 걸 알고 기뻤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 후원자들 역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인지 알았으면 합니다.”
조명환 교수는 진솔하게 때론 유머스럽게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자신의 후원자에 대해 말했습니다. 15달러의 손길이 열어준, 세상으로 향한 창. 그것을 그는 잊지 않았습니다.
어른이 되어 이제는 예전의 자신처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빈곤, 불평등 속에서 고통받는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믿어지지 않는 선의와 아름다움을 만났을 때, 한 평범한 인간이 보내온 사랑의 온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함께 감사하고, 한없이 겸손해집니다.
[안내] 아동의 개인정보와 신변 보호, 아동간 상대적인 박탈감 예방 등을 위한 노력으로, 현재는 세이브더칠드런을 통한 아동과의 서신교환이나 만남 이외의 개인적인 교류는 허용되고 있지 않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
글 이선희(마케팅커뮤니케이션부) ) | 사진제공 조명환, 세이브더칠드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