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100년 전인 1924년, 국제연맹은 최초로 아동 인권에 관한 국제 문서를 승인합니다. 바로, ‘제네바 세계아동권리선언’입니다. 에글렌타인 젭의 ‘아동권리선언문’이 초안이 되었고, 유엔아동권리협약의 모태가 된 ‘제네바 세계아동권리선언’ 선포 100주년을 맞이하여 세이브더칠드런은 평소 우리 곁에 있지만, 잘 알지 못했던 아동의 이야기를 ‘레드레터’로 전합니다. 5월(🔗특별한 보호조치가 필요한 아이들)을 시작으로 6월(🔗이주배경 아동), 7월(🔗디지털 성착취 피해 아동), 8월(🔗분쟁지역 속 아동), 9월(대중문화예술 분야 종사 아동)의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올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었습니다. 잠깐만 바깥에 서 있어도 땀이 쏟아지던 한 여름날, 합정동 스튜디오에서 허정도 배우를 만났습니다. 창 밖으로 여름의 한낮을 바라보던 그는 땡볕에 촬영현장에서 어른들과 함께 일하던 아이들을 떠올렸습니다. 그 아이들은 살을 에이는 추위에도, 유해물질이 가득한 세트장에서도, 자극적인 장면을 촬영할 때도 어른들과 함께였습니다. 아이돌과 연습생들도 지나친 경쟁과 무리한 다이어트, 쉼 없는 스케줄을 소화해야 합니다. 촬영현장에서 연기자가 되고 싶고, 가수가 되고 싶은 아이들은 이 정도는 가볍게 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 잊히지 않는, 잊지 않아야 할 기억
아이들이 일하는 환경은 어른과 별다르지 않습니다.
과거의 촬영 현장은 노동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잘 수 없고, 쉬지 못하는 긴박한 촬영 일정과 현장 환경은 노동자들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만들었습니다. 예민함은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상처를 냈습니다. 허정도 배우는 어른보다 갑옷이 덜 단단해진 아이들이 현장에서 어른들에게 상처받는 일을 보면서 여러 번, 애써 눈을 감아야만 했습니다.
제일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추워서 울고 있는 한 10살도 안 돼 보이는 아이들… 막 울고 있는데 아무도 이걸 멈추거나 뭘 입혀주자거나… 현장은 늘 급하고, 저도 아무 말 못 했고… 제가 봤지만 아무 말을 못 했던 순간들은 너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게 제일 미안하죠.
참는 일이 쌓이다, 도저히 참기 어려워 목소리를 냈습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아이들을 향한 보호망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 위태로운 카메라 속 아이들
열악한 환경 속에서 꿈을 이루기 위한 아이들이 현장에서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이 참아내는 일입니다.
내가 이 바닥에서 버티기 위해서는 힘든 티를 안 내야 한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배우기 때문에, 자기한테 뭐가 필요한지도 잘 모르는데, 안다고 해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죠. 현장에서 아이들도 더워도 같이 있고 땡볕에, 추워도 같이 떨고 어른들이랑. 가수 쪽에서도… 폭행도 있었고, 건강에 관련된 문제도 있었고. 데뷔하는 확률도 매우 낮고, 아무런 준비 없이 어른이 돼버리는 거예요.
‘대중문화산업 종사 아동·청소년 인권상황 실태조사’ 연구에 따르면, 대중문화 산업에 종사하는 아동·청소년은 외모 스트레스와 다이어트 및 성형 강요, 열악한 합숙 시스템, 데뷔와 캐스팅 불확실성으로 인한 정서적 불안감, 촬영현장에서의 인권 침해, 신체적 체벌, 위계적인 분위기, 현장에서의 성폭행 위험, 학습권 침해 등을 경험하였습니다(아동·청소년미디어인권네트워크, 2020) 연습생, 배우, 가수이기 전에 대한민국의 아동·청소년이지만, 기본적으로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권리들이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 더 촘촘한 보호망 필요해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제32조를 통해 모든 아동은 위험하거나 교육에 방해되거나, 건강이나 신체적·지적·정신적·도덕적·사회적 발달에 해로운 모든 노동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입법적·행정적·사회적·교육적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을 통해 아동·청소년을 위한 조항을 마련했지만, 실효성이 없습니다.
체류시간, 노동시간, 휴식시간(에 대한 기준이) 구체적으로 연령대별로 있었으면 좋겠고, … 촬영 환경에 대해서도 미세먼지도 많아졌고, 실내 환경에 대한 기준도 제시가 됐으면 좋겠고요. 몇 도 이상, 몇 도 이하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이 구체적으로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을 대신할 수 있는, 혹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챙기고 케어하고 요구할 수 있는 담당자가 우리나라에도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에 빠진 아동·청소년의 권리를 명시하고, 촬영 현장에서의 아동·청소년 인권 보호관 제도를 도입하고, 연령대에 따른 최대 노동 시간 규정을 세분화해야 하지만 해당 내용을 담은 입법적 노력은 21대 국회에서 멈추었습니다.
● 작은 걸음과 나타나는 변화
더딘 걸음 속에도 분명 변화들이 있습니다. 허정도 배우의 목소리에 공감하고 현장을 함께 바꾸고자 하는 좋은 어른입니다. 허정도 배우는 이런 제작자들의 작품을 더 눈여겨 봐주고 응원해달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현장에 아이들과 함께할 때 지켜야 할 어른들의 수칙에 대해 만들어 놓은 게 있어요. 아이의 입장에서 그런 수칙을 만든 것을 본적이 있고, 저희 ‘아미넷’에서 만든 가이드라인을 채택해 주신 연출자도 있고, 그런 경우들이 다행히도 반갑게 있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분명한 위로가 되고 울타리가 됩니다. 하지만 개인의 선의에만 의존하기에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위태롭기만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관심이 모여 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고 허정도 배우는 나직히 이야기하며 함께 나아가 주길 당부했습니다.
선의를 가진 분들이 이렇게 스스로 행동하시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현장에서 아이들은 방치되어 있는 것이죠…. 세상은 제가 한 만큼 바뀝니다. 내 자리에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가 있고, … 쌓이면 백 걸음이 되고, 천 걸음이 되고. 그런 걸음을 응원하겠습니다.
한국 문화의 위상은 달리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계 반대편의 사람들이 한국 콘텐츠를 좋아한다며 엄지손을 추켜세우는 모습은 이제 놀랍지 않습니다. 모두가 즐기는 콘텐츠를 만들다 누구도 다쳐서는 안 됩니다. 아동·청소년 아티스트를 포함해 만드는 사람 모두가 행복한 콘텐츠들은 더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것입니다.
인터뷰·사진 김소영(권리옹호부문) 정리 이예진(커뮤니케이션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