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영국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 43세의 에글렌타인 젭은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는 2살 반짜리 오스트리아 여아의 모습이 담긴 전단지를 돌리다가 체포됐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 등 승전국들은 전쟁을 일으킨 동맹국에 가혹한 봉쇄정책을 폈고 이로 인해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는 아사자가 속출했습니다. 에글렌타인은 지인들과 함께 영국 정부에 봉쇄정책 중단을 요구하는 활동을 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에글렌타인은 아이들을 직접 도울 수 있도록 구호 기금을 모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전단지를 들고 트라팔가 광장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체포된 에글렌타인은 재판을 받게 됩니다. 검사의 기소 내용은 “용납할 수 없는 문구(“영국은 무엇을 지지하는 것인가? 아이들을 굶겨 죽이고 여성들을 고문하고 노인들이 목숨을 잃게 만드는 것?”)가 담긴 포스터와 전단지 2종, 약 7000장을 배포”한 혐의였습니다. 당시의 “전시 국토방위법”에 따르면 상당한 기간 동안 감옥에 가거나 전단지 1장당 5파운드의 무거운 벌금을 물 수도 있는 사안이었습니다. 하지만 국적이나 정치적 입장에 관계없이 아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에글렌타인의 주장은 호소력이 있었습니다. 에글렌타인은 유죄를 선고받긴 했지만 벌금은 단 5파운드였고 이는 사실상 승소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리고 에글렌타인을 기소한 검사 아치발드 보드킨도 에글렌타인의 뜻에 동참하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5파운드를 기부했습니다.
재판이 끝나고 며칠 뒤인 5월 19일, 에글렌타인은 로얄 앨버트 홀에서 “세이브더칠드런펀드”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킵니다. “적국의 아이들을 위해 돈을 모으려는 배신자”에게 던지려고 썩은 사과를 가지고 몰려든 사람들도 있었지만, 창립 대회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적대적이었던 사람들로부터도 지지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날 에글렌타인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한 명의 아이라도 더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단 한 가지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 아이가 어느 나라 아이이건, 어떤 종교를 가졌건 상관없이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에글렌타인 젭 전기(The Women Who Saved the Children: A Biography of Eglantyne Jebb, Oneworld, 2009)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